작곡가 이지수 /마이스터 뮤직 제공
작곡가 이지수 /마이스터 뮤직 제공
내 운명을 가른 것은 그날의 우연이었다. 피아노가 전공인 친구와 드라마를 찍으러 간 날. 우리는 모두 피아노 연주 장면에 쓸 대역들이었다. 촬영팀은 세 명을 불렀다. 한 명은 배용준의 손, 한 명은 최지우의 손, 또 한 명은 배용준의 고교 시절 연주 뒷모습. 작곡 전공이었던 내 몫은 배용준의 고교 시절 뒷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날 감독은 피아노를 전공한 친구 손을 보더니 “너무 통통한데…”라며 주저했다. “네가 손 대역 해라.” 그게 나였다.

행운은 겹쳤다. 배용준이 극 중에서 연주해야 할 피아노곡이 도착하지 않았다. 촬영이 무한정 지연됐다. 감독에게 다가갔다. “제가 쓴 곡이 하나 있는데요. 들어보시고 괜찮으면 그냥 이걸로 촬영해 주세요.” 감독의 OK 사인이 났고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다. 그 곡은 드라마와 함께 전파를 탔다. 한국 드라마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겨울 연가’의 메인 테마였다.

지금은 국내 영화음악계의 우뚝한 봉우리가 된 작곡가 이지수(33). 그의 시작도 드라마 같았다. 원래는 모범생 클래식 음악도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드보르자크, 베토벤의 교향곡에 푹 빠져 컸고,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수석 입학한 기대주였다.

하지만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던 영화와 드라마 음악이 세상의 귀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영화 ‘실미도’부터 ‘친절한 금자씨’ ‘마당을 나온 암탉’ ‘건축학 개론’에다, 드라마 ‘겨울연가’ ‘여름향기’ ‘봄의 왈츠’, 뮤지컬 ‘기발한 자살여행’ ‘겨울연가’, 심지어 TV 뉴스 음악에 이르기까지. 지금은 히트작만 해도 두 손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

[인터뷰] 배용준 대역에서 시작된 인생의 새길
대중음악 데뷔 12년째. 이제 다시 클래식으로 돌아와 음반을 냈다. 앨범 제목은 ‘아리랑 콘체르탄테(Arirang Concertante)’. 수록곡을 전부 ‘아리랑’으로 채웠다. 세계 정상급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고, 프랑스 롱티보 크레스팽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안종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소프라노 황수미,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출신 소리꾼 김나니, KBS 국악 대상 관악상을 받은 대금 연주가 이용구가 협연했다.

8일 연주회 준비에 한창인 그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비가 오락가락하던 지난 2일 서울 시내 한 호텔 커피숍. 호리호리한 체구의 그는 손이 웬만한 여자보다 가늘고 예뻤다. 웃을 땐 두 눈이 실처럼 가늘어지다가 아예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음악 이야기를 할 때는 눈빛이 이내 되살아났다. 이번에 협연하는 피아니스트 안종도(28)도 함께 자리해 이야기를 거들었다.

-이번 ‘아리랑 콘체르탄테’ 앨범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어떤 의미가 있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세계 정상급 실력과 명성을 자랑한다. 권위 있는 클래식 음반 레이블인 도이치그라모폰이 세계 4위로 꼽았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정통 클래식만 고집하지 않고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같은 영화음악에도 참여할 만큼 열린 사고를 하는 오케스트라이기도 하다. 이 정도 수준의 오케스트라가 정식으로 우리나라의 크로스오버 음반 녹음에 참여한 건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안다.
[동영상] 이지수&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 아리랑 환상곡


 ‘아리랑 콘체르탄테’ 작업 중인 작곡가 이지수와 협연자들/마이스터 뮤직 제공
‘아리랑 콘체르탄테’ 작업 중인 작곡가 이지수와 협연자들/마이스터 뮤직 제공
-‘아리랑’을 차용한 음악을 전에도 발표한 적이 있지 않나?

2007년에 밀양 아리랑을 변형한 ‘아리랑 랩소디’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때는 뉴에이지 앨범 속의 ‘보너스 트랙’ 느낌으로 냈다. 당시엔 서정적이고 잔잔한, 예쁜 느낌의 뉴에이지 스타일이 유행했다. 그래서 대중 기호를 맞추기 위해 앨범 수록곡 대부분을 그런 분위기에 맞췄다. 제일 마지막 트랙에 ‘내 마음대로 하는 곡도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하면서 넣은 곡이 아리랑 랩소디였다. ‘영화음악가가 아리랑을 다루면 어떤 음악이 나올까’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듯 접근한 곡이었다.
[동영상] 이지수&체코필하모닉오케스트라 - 아리랑랩소디(2007)

다른 곡은 별 반응이 없었던 데 반해 사람들이 이 곡을 제일 좋다고 했다. 내가 열심히 대중 취향을 고려해서 만든 곡이 아니라, 그냥 ‘한 곡만 내 마음대로 해보자’ 하고 쓴 곡에 제일 공감한 거다.(웃음)

그래서 아, 의외로 사람들이 이런 걸 원했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그렇다면 내가 한국 작곡가니까, 언젠가는 한국 사람만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 싶었다. 아리랑으로만 한 장의 앨범을 꽉 채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실현한 거다.

-아리랑 랩소디 한 곡만으로는 부족했나 보다.

아리랑 랩소디는 길이가 아주 짧다. 보너스 트랙 개념으로 썼기 때문이다. 연주 시간이 2분 정도에 불과하다. 곡을 좋아해 준 사람들도 “이 길이는 앙코르곡밖에 안된다”고 불평을 많이 했다. 그래서 다음엔 여기에 2악장, 3악장을 더 만들어서 하나의 큰 곡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꿈이야 꾸지만 사실 실행은 쉽지 않다. 제작 비용도 많이 들고, 내가 하고 싶을 때 기회가 쉽게 오는 것도 아니다. 마침 이번에 문화체육관광부가 하는 아리랑 세계화 사업과 내 의도가 꼭 맞아서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처음 생각과 달라진 게 있다. ‘기왕 하는 거 여러 아리랑을 주제로 여러 곡을 만들어보자’ 싶어서 2, 3악장 대신 곡을 더 다양하게 만들었다. 곡을 완성한 뒤 전부터 눈여겨봤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함께 녹음하고 싶다고 연락을 했고, 그쪽에서도 곡을 보더니 좋다, 함께 하자고 해서 이번 앨범이 나오게 됐다.

-작곡은 언제, 어떻게 시작했나?

아주 어릴 땐 피아노를 배웠다. 어머니가 피아노를 즐겨 치셨는데, 다섯 살 때부터 어머니께 피아노를 배웠다. 혼자 칠 수 있게 된 뒤에는 피아노를 갖고 장난을 많이 치며 놀았다. 그 뒤로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큰 영향을 받았다. 그분이 동요를 작곡하는 분이셔서 동요 악보도 많이 보게 됐고, 듣기도 많이 들었다. 4학년 때 그분이 또 담임 선생님이 됐고, 그때 반장을 하면서 선생님과 더 가까워졌다. 그때는 동요를 혼자 작곡해서 선생님께 보여드리기도 하며 그렇게 혼자 즐기곤 했다.

제대로 된 곡을 작곡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5학년 때쯤? 학교에서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을 들려줬는데 푹 빠졌다. 나도 그런 곡을 써보고 싶어서, 어머니를 졸라 악보를 샀다.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스코어(총보)였다. 악보 그릴 줄도 모르는 애였는데, 그냥 그걸 그대로 따라 그렸다.

말 그대로 '흉내 내기'였는데, 그렇게 놀이하듯 악보를 그리면서 내 머릿속 판타지를 펼치기 시작한 것 같다. 결국 어머니께 작곡을 배우게 해 달라고 졸랐다. 5학년 때 작곡 공부를 시작해 예원학교 작곡과에 입학했다. 그 당시만 해도 작곡하는 친구들이 많지는 않았다.

-작곡도 어릴 때 시작해야 하나?

글쎄, 요즘은 초등학생 때부터 작곡을 시작하는 친구들이 많다. 영재 아카데미 이런 곳에서 배워서 벌써부터 소나타를 작곡한다거나.(웃음) 꼭 어릴 때 작곡을 시작하고 잘한다고 해서 무조건 끝까지 잘 되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연습도 중요하지만….

-조기 교육보다 재능이 더 중요하다는 건가?

아무래도 작곡은 좀 그런 면이 있지 않나 싶다.

-예원학교, 서울예고, 서울대를 거치면서 쭉 클래식을 했다. 영화음악, 대중음악에는 어떻게 발을 들이게 됐나?

정말 우연한 계기로 하게 됐다. 대중음악은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주인공 배용준씨의 손 대역을 하면서였다.

영화음악은 따로 계기가 있었다. 작곡과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편곡을 많이 한다. 공연이나 음반 편곡도 많이 했는데, 소개를 받고 또 소개를 받고 하면서 영화음악 감독에게까지 내 얘기가 들어간 거다. 같이 일하자면서 연락하신 분이 알고 보니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과 함께 작업하신 조영욱 감독이었다.

그때 음악 작업에 참여한 작곡가가 셋이었다. 심현정, 최승현, 이지수. 서로 주제도 다른 걸 맡고 음악 스타일도 다르게 갔다. 그중에 내가 맡은 게 클래식 풍 음악에 우진의 테마였다. 그런데 영화가 생각 이상으로 매우 잘 됐다.(웃음) 그 뒤로 실미도나 다른 작품으로 이어졌다.

 ‘아리랑 콘체르탄테’ 작업 중인 이지수/마이스터 뮤직 제공
‘아리랑 콘체르탄테’ 작업 중인 이지수/마이스터 뮤직 제공
-겨울연가에서 배용준씨 대역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

사실 먼저 대역 제안을 받은 건 피아노를 전공한 내 친구였다. 그때 촬영팀 쪽에서 대역을 세 사람 데려오라고 했다. 한 명은 배용준씨 손 대역, 한 명은 최지우씨 손 대역, 또 한 명은 고등학생 시절 배용준씨 뒷모습 대역. 나는 뒷모습 대역으로 간 거였다.

촬영장에 갔더니, 감독님이 피아노 전공한 친구 손을 보고는 “너무 통통한데…” 하더니 나보고 “네가 손 대역 해라” 하셨다. 그래서 서로 역할이 바뀐 거다.(웃음)

사실 당시 촬영장 분위기가 안 좋았다. 배용준씨가 쳐야 할 피아노곡이 아직 나오질 않아서 찍을 수가 없었던 거다. 촬영이 너무 지연되길래, 감독님께 가서 “제가 쓴 곡이 하나 있는데 들어보시고 괜찮으면 그냥 이걸로 촬영해 주세요”라고 했다. 그 곡을 감독님이 괜찮게 보셔서 그대로 촬영을 하게 됐다.

그 장면이 그대로 방송에 나갔고, 감독님이 드라마에 넣을 다른 곡도 좀 써보라고 해서 함께 작업하게 됐다. OST에도 내 곡이 들어갔는데, 뒷모습 대역이 돼 버렸던 친구가 내 곡을 연주해서 녹음했다.(웃음)
[동영상] 드라마 ‘겨울연가’ 수록곡 ‘처음’(2001)

-그 인연으로 ‘여름향기’ ‘봄의 왈츠’까지 계속하게 된 건가?

그렇다. 재미있는 게, 겨울연가 촬영 때 감독님이 엄청난 신기술을 구사하셨다. 그전까지 피아노 연주 장면은 카메라가 배우 얼굴 따로, 대역 손 따로 찍어서 합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겨울연가에선 카메라가 배우의 머리에서부터 손까지 끊지 않고 한번에 쭉 훑어내린다. 그러니까 실제로 배우가 피아노를 치는 것 같은 모양이 나온다. 그런데 그 기술이란 게 사실 내가 뒤에서 배우를 껴안고, 앞을 못 보는 상태에서 피아노를 치는 거다. 팔 짧은 사람이라면 아마 못했을 거다.(웃음)

그 뒤로 감독님이 계속 극 중에 피아노 연주 장면을 넣었다. ‘여름향기’에 피아노 연주 장면이 나오니 대역 하러 오라고 해서 갔고, ‘봄의 왈츠’는 아예 남자 주인공이 피아니스트로 나온다.(웃음) 그렇게 인연이 계속 닿았다.

이지수가 작곡가, 음악 감독으로 참여한 영화들
이지수가 작곡가, 음악 감독으로 참여한 영화들

-그게 다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라고 했는데, 교수님한테 밉보이지 않았나?

그때는 과도기였다고 볼 수 있다. 내 지도 교수님은 독일에서 공부하신 고(故) 장정익(1946~2012) 교수님이셨다. 그분은 굉장히 파괴적이고 혁신적인 성향의 현대음악을 추구했는데, 늘 나한테도 “넌 독일로 가야 한다, 독일어 공부해라”고 하셨다. 내가 “영어 공부하면 안 됩니까?” 하면 “안 돼, 독일어 해야 한다”고 했다.(웃음) 사실 나도 그걸 당연하게 여기긴 했다. 여기에서 공부한 뒤엔 독일 유학생이 되겠구나 하고 살았다. 현대음악 자체도 좋아했고, 나중에는 현대음악 작곡가가 되는 게 꿈이기도 했다.

그런데 도중에 대중음악을 하게 된 거다. 교수님도 처음에는 “그래, 네가 하고 싶은 거라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다 해봐라” 하시면서 “그래도 현대음악은 계속해라” 하셨다. 나도 그때 생각은 그랬다. 정통 클래식에서 말하는 현대음악과 대중음악 작곡, 두 가지를 병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두 가지를 병행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결국 2년 정도 휴학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평생 한우물만 파도 그것도 다 못 파겠다 싶은 거다. 영화음악 하나만 평생 공부해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싶었다. 현대음악도 마찬가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점점 마음이 영화음악 쪽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현대음악을 접었다. 다행히 그 뒤로 다른 교수님들, 전상직, 최우정, 이신우 교수님 같은 분들이 내 선택을 많이 지지해주셨다. 학교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원래는 졸업 후 진로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학교에선 충실하게 배우되 졸업 후에는 배운 걸 어떻게 쓰든지 알아서 하는 방향으로.

-서울대 음대 선배 중에 대중음악으로 진로를 바꿔 성공한 유희열(90학번)씨가 있지 않나. 학교에서는 어땠나?

당시 유희열 선배는 거의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학교를 나가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래서 졸업도 쉽게 못 했다. (뒤늦게 2004년 졸업)

그래도 요즘은 세대도 바뀌었고 분위기도 많이 바뀐 걸로 안다. 현대음악 인구 자체가 과거보다 많아진 영향도 있다. 지금은 좀 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분위기가 된 것 같다.

 서울대 음대 작곡과 출신의 가수 겸 작곡가 유희열
서울대 음대 작곡과 출신의 가수 겸 작곡가 유희열
-원래 전공한 현대음악과 지금 하는 영화음악의 차이는 뭔가?

글쎄, 현대음악이라는 건 이른바 무조성 음악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조성이 거의 없고, 리듬도 파괴된, 그야말로 새로운 사운드를 추구하는 음악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음악은 대중음악 중에서도 클래식한 편에 속한다. 영화음악은 원래 정해진 장르가 없다. 장면마다 워낙 다양한 장르가 들어가기 때문에. 클래식도 있고 재즈도 있고 록도 있다. 공포영화에서는 현대음악도 쓴다. 팝도 넣고, 발라드도 나오고. 그 중에서도 나는 클래식에 기반하고 있어서 상당히 클래식한 풍의 음악을 쓰는 편이다.

-클래식을 전공한 영화음악 작곡가로서 전공 덕분에 좀 쉬웠던 점, 반대로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그래도 쉬웠던 건 영화음악 중에서도 클래식풍 음악이다. 보통 영화음악에서 용인하는 게 고전주의, 낭만주의 음악까지다. 공포영화면 현대음악까지 쓴다. 이런 식의 클래식풍 영화음악은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재즈나 록, 팝 같은 다른 장르였다. 나한테는 완전히 새로운 공부였다. 다뤄야 하는 장르가 많다 보니, 영화음악 하나만 파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음악만 골라서 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면 국내 음악계에서는 살아남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장르 저 장르, 다양한 장르를 고루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클래식 음악가의 영향도 받는 편인가? 어떤 작곡가를 제일 좋아하나?

물론 영향을 받는다. 나는 원래부터 브람스를 굉장히 좋아했다. 굉장히 깊은 매력이 있다. 브람스 특유의 우울함, 심각함… 그런데도 멋있는 매력?(웃음) 브람스의 그런 면을 좋아했다. 그 영향이 지금 내가 하는 대중음악에서도 나타난다. 뭔가 깊이 있는 음악을 쓸 땐 나도 모르게 브람스의 화성 진행이라든가 그런 영향이 나오는 것 같다.

또 다른 작곡가로는 드보르자크,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이들 음악은 대중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낭만적인 멋이 있다. 클래식이지만 대중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그런 코드랄까. 그 영향도 많이 받은 것 같다.

이지수는 “영화음악은 영상과 음악이 정확히 맞아 들어가도록 컴퓨터로 먼저 작곡한다”고 했다./마이스터 뮤직 제공
이지수는 “영화음악은 영상과 음악이 정확히 맞아 들어가도록 컴퓨터로 먼저 작곡한다”고 했다./마이스터 뮤직 제공
-학생 시절 대중음악도 많이 들었나?

그렇…그…런가?(웃음) 사실, 작곡이라는 게 “들어오는 게 그대로 나온다”는 말이 있다. 듣는 걸 그만큼 조심해야 한다. 내 경우엔 중고등학교 때 일부러 가요를 안 들었다. 가요를 들으면 학교 향상음악회 때 발표하는 곡에 가요가 나와버려서.(웃음) 물론 가끔은 들었지만 거의 듣지 않았다.

좀 더 다양하게 듣기 시작한 건 대학에 들어간 뒤다. 현대음악을 듣기 시작하면서 음악을 듣는 관점이 많이 바뀌었다. 현대음악이란 게 사실 많이 바뀌어야 들을 수 있기 때문에.(웃음) 현대음악을 듣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은데, 원래 익숙해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자꾸만 듣다보면 좋아지는 순간이 온다.

그런데 내겐 현대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가 다 그랬던 것 같다. 사람들이 좋다 좋다 하는데, 나는 이게 뭐가 좋은 건지, 뭐가 나쁜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듣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기준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떤 곡이 좋은지, 또 어떤 곡이 별로인지 구분이 되기 시작했다. 그 음악에 익숙해지고 알면 알수록 그런 게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결국, 아는 만큼 들린다는 거다.

-보통 작업 과정은 어떤 순서로 진행되나?

사실 음악 작업은 영화 제작 전체 과정 가운데 아주 후반부에 해당한다. 처음에는 시놉시스나 시나리오를 먼저 받아보고 분위기를 상상한다. 콘셉트만 잡는 정도다. 어떤 악기를 쓰고, 어떤 장르를 할지 대략 결정한 뒤, 테마만 간단하게 써 둔다.

본격적인 작업은 영화 화면이 다 완성된 뒤에 한다. 화면을 컴퓨터에 띄워 놓고, 정확히 맞춰서 컴퓨터로 작곡한다. 곡이 확정되면 그걸 바탕으로 실제 악기 연주 녹음을 한다. 마감 기한은 짧으면 한 달, 보통은 두세 달, 아주 길면 일 년 정도 줄 때도 있다.

-쪽대본이 나오기 일쑤라는 드라마 음악은?

드라마 음악은 또 완전히 다르다. 드라마는 촬영 화면을 받고 방송되기까지 시간이 굉장히 짧다. 촬영 끝난 지 열 두 시간도 안 돼서 방송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영화와는 달리 미리 음악을 다 써둔다. 예상문제 맞추기 하듯, 예상되는 상황에 따른 곡을 미리미리 써서 준비해두는 거다.

예를 들어 ‘밝은 테마’ 하면 원 주제 선율을 밝은 느낌으로 한 곡 써 둔다. 그리고 악기마다 느낌이 다르니까 다양한 악기로 연주한 걸 녹음해 놓는다. 바이올린 버전, 피아노 버전, 기타 버전 하는 식이다. 이렇게 미리 써 놓고 녹음해둔 걸 적절하게 장면에 따라 편집해 넣는 거다. 그런 식으로 100곡 넘게 미리 써두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 음악이 더 부담스럽겠네?

꼭 그런 건 아니다. 영화음악과 드라마 음악은 장르가 많이 다르다. 드라마는 밥 먹다가 보고, 이야기하다가 보고, 그러다가 재미없다 싶으면 너무나 쉽게 돌려버릴 수 있다. 그러니 TV 음악은 좀 자극적이다. 시청자 귀를 단번에 사로잡아야 하니까. 별거 아닌 상황에서도 음악은 엄청나게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경우가 많고. 사실 귀 막고 보면 아무 일 없는 것 같아 보이는데.(웃음) 그만큼 음악의 역할이 더 크다고 보면 된다.

반면, 영화는 제한된 공간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커다란 화면에 큰 음향으로 음악을 들려준다. 당연히 집중도가 TV보다 훨씬 높다. 그래서 음악이 자극적일 필요는 없지만 더 섬세한 작업이 많이 필요한 편이다.

-곡 쓸 때 영감은 어디에서 얻나?

주로 하는 작업이 영화음악이니까, 보통 영상을 받아 보고 거기서 떠오르는 느낌을 바탕으로 쓰는 게 대부분이다. 사실 이런 식의 기능 음악은 오히려 쓰기가 쉬울 수 있다. 주어진 상황과 목적이 분명하니까 거기에 충실하면 된다. 오히려 순수음악은 내가 모든 상황을 다 만들고 짜내야 하는 거라서 신경이 더 많이 쓰인다.

[인터뷰] 배용준 대역에서 시작된 인생의 새길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지수. 그는 다섯 살 때부터 어머니께 피아노를 배웠다. /마이스터 뮤직 제공
-순수 음악을 하던 사람이 기능 음악을 하다 보면 갑갑하지 않나?

꼭 어느 한 쪽만 아쉬워하거나 하는 건 아닌데, 특성이 많이 다른 게 사실이다. 기능 음악을 할 때엔 말 그대로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 내가 욕심을 내서 음악 자체에 힘을 주기보다, 영상에서 비는 공간만 채우는 거다. 분명히 답답한 점도 있지만, 영상과 음악이 만나 내는 시너지가 매우 크다는 게 장점이다.

반대로 음악만으로 승부해야 하는 순수 음악은 내가 마음껏 펼칠 수 있다는 게 좋지만, 영상과 만났을 때 나오는 그런 시너지를 기대할 수가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쪽을 하고 있으면 저쪽이 아쉽고, 저쪽을 하고 있으면 이쪽이 아쉽다. 이번에 아리랑 콘체르탄테를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예전에도 종종 영화음악 말고 솔로 음반을 냈는데, 기능 음악만 하고 있어서 답답해지면 앨범을 내곤 했다. 그러고 나면 또 영화와 함께 시너지를 내고 싶어서 영화음악을 하고. 그런 식으로 좀 왔다갔다하고 있다.

작곡가 이지수가 발표해 온 솔로 앨범. 왼쪽부터 ‘처음’ ‘Love Poem’ ‘Dream of...you’
작곡가 이지수가 발표해 온 솔로 앨범. 왼쪽부터 ‘처음’ ‘Love Poem’ ‘Dream of...you’
-다른 민요를 제쳐 놓고 아리랑을 고른 이유는?

아리랑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멜로디이기도 하지만, 특히 외국 사람들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를 가진 멜로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이번에 런던 심포니와 녹음할 때 단원들이 “이거 우리나라 민요 어메이징 그레이스랑 비슷한데?”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래서 “맞다, 너네 어메이징 그레이스 비슷한 거다”라고 답해줬다.

정말로 살펴보면 두 음악의 선율이 상당히 닮았다. 두 선율 모두 장조에다, 속도는 느리고 음역대는 좁다. 그리고 단순한 선율이 반복된다. 이런 친근한 요소들이 듣는 사람에게 편안하게 다가가고, 회상에 잠기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는 게 아닐까. 그래서 아리랑이 보편적으로 통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번 앨범에서 다른 곡은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이런 식으로 원 제목을 살렸는데, 피아노 협주곡 둘만 ‘센티멘탈 왈츠 아리랑’ ‘아리랑 포에티크’ 이렇게 클래식 음악 같은 제목을 붙였다.

이번 프로젝트를 하면서 곡마다 서로 다른 콘셉트를 정했다. 아리랑이라는 멜로디 하나로 여러 곡을 쓰는 거니까. 뮤지컬 아리아 느낌의 아리랑은 소프라노 황수미가 부르는 ‘아라리요’로 하고, 소리꾼 김나니가 부른 ‘강원도 아리랑’ ‘한 오백년’은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판소리가 만드는 사극 느낌, 이런 식이다. 그 가운데 낭만주의 음악에 입각한, 그야말로 ‘클래식 음악스러운’ 아리랑도 쓰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떠오른 친구가 피아니스트 안종도다. 이 친구한테 어릴 때부터 화성학을 가르치면서 선생님과 제자로 만났는데, 부드러운 터치나 루바토 감각이 뛰어나다. 작곡 숙제를 내주면 쇼팽 스타일로 작곡해오고.(웃음) 그래서 안종도를 염두에 두고 쓴 곡이 이 두 곡이다. 이 곡 제목도 이 친구가 추천했다.


 작곡가 이지수(사진 왼쪽), 그와 오랜 인연을 맺어 온 피아니스트 안종도/윤예나 기자
작곡가 이지수(사진 왼쪽), 그와 오랜 인연을 맺어 온 피아니스트 안종도/윤예나 기자
-안종도씨는 ‘이건 내 곡이네’ 하는 느낌이 왔나?

안종도: 받자마자 딱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냥 아리랑이라고 하기엔 곡이 가진 느낌이 너무 다양했다. 그냥 우리 민족의 ‘한(恨)’을 담았다기보다 그걸 넘어서 더 많은 걸 담았다고 해야 할까.

전에도 아리랑을 주제로 곡을 쓴 작곡가가 대단히 많았다. 나도 여러 장르로 편곡된 버전을 들어봤고. 그런데 이 단순한 선율에, 너무 많은 걸 담으려 한 곡이 많았다. 청중한테도 작곡가의 느낌을 그냥 강요하는 듯한. 정말 한국적인 사람에게 너무나 거추장스럽고 안 어울리는 옷을 입힌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아주 많은 걸 시도하는데도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느낌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이번 아리랑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걱정을 좀 했다.

한데 막상 곡을 받고 보니 과하지 않게, 조화를 잘 이룬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랑이라고 하면 단순한, 밝은 선율 안에 굉장히 절절하고 강한 감정을 담아낸 노래 아닌가. 그런데 내가 연주한 두 곡은 한 발짝 물러나서, 그 감정을 우아하고 서정적으로 풀어낸 느낌이다. 아리랑이 지수형이 생각하는 음악의 요소와 잘 맞물려서, 한 그릇에 정갈하게 잘 담겼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지수: 아마 10년 전에 썼다면 나도 굉장히 ‘과하게’ 썼을 것 같다. 보통 이쪽 음악을 처음 하는 사람은 굉장히 힘이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영상 음악에서는 내 욕심이 많이 들어가면 역효과가 난다. 나도 그랬다.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10년 동안 ‘버리는’ 작업을 해왔고, 이제야 균형이 맞는 시기가 된 것 같다.

-좋은 영상 음악은 어떤 건가?

영화음악을 공부할 때 처음 배우는 게 ‘가려짐의 원칙’이다. 의식적으로 음악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극 흐름에 맞는 정도의 음악만 나와야지, 음악이 시청자의 귀에 들리는 순간 영상의 집중도를 음악에 빼앗긴다. 기본 개념이 이렇다. 이걸 기반으로 하면서 정말 필요한 순간, 감정을 끌어올리는 한순간에만 음악이 치고 나와야 한다. 내가 이런 걸 처음에 굉장히 못 했다.

-자기 음악이 주인공이던 클래식 양식에 더 익숙해서 그랬던 건가?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다. 클래식 작곡을 할 때에는 다른 요소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음악만으로 청중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 자연스럽게 음악 자체에 힘을 실어야 했다. 음악만 들려줘도 청중이 끌려오는 게 좋은 음악이니까.

하지만 영화음악을 그렇게 하면 실패한다. 영상 자체에 이미 좋은 요소가 많은데, 음악까지 ‘나도 좋으니까 음악을 들어!’ 하면서 나오면 정말 물과 기름처럼 겉돈다. 관객의 집중도도 분산된다. 좋은 음악이라는 건 영상이 주도권을 갖고 가다가 여유를 주는 타이밍에만 음악이 치고 올라오는 거다.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았다.

영화 OST를 들어본 적이 있으면 이해하기 쉬울 거다. 영화 볼 땐 정말 좋았는데, 막상 음악만 들어보면 ‘음? 멜로디도 없고 노래도 안 나오는데 이게 뭐하는 거지?’ 할 때가 있다. 그게 바로 잘 된 영화음악이다. 혼자서 튀지 않고 ‘분위기’를 정확하게 잡고 있는 음악. 가끔은 그렇게 분위기만 잡는데도 그 자체로 좋은 음악이 있는데, 그건 대가들의 작품이다.(웃음)

-영화음악 작곡을 꿈꾸는 사람에게 조언한다면?

일단 자기가 가진 무기가 좋아야 한다. 그만큼 실력을 키우라는 얘기다.

-현실적으로 업계에 진입하는 절차는 어떤가?

정해진 코스는 없고 일하게 되는 건 여러 경로가 있다. 예를 들어 학생 때는 독립영화 하는 감독과 함께 일해보는 것도 좋다. 무보수로, 그냥 ‘열정 페이’로 일하는 거.(웃음) 그 때 감독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준다면, 이 감독이 정식으로 데뷔한 뒤에는 영화음악 감독으로 부를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내가 무작정 작곡한 곡들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감독이나 제작자에게 가볼 수도 있고. 구직 활동이라고나 할까. 내 경우처럼 아르바이트든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고 있으면, 모르는 곳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연락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기본 전제는 내 실력이 좋아야 한다는 거다.

작곡가 이지수/윤예나 기자
작곡가 이지수/윤예나 기자
-작품을 시리즈로 많이 했는데.

마찬가지 이야기다. 첫 작품을 할 때 인상이 좋으면 다음 작품도 계속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첫 작품 때 제대로 못하면 바로 아웃이고.(웃음) 이쪽 업계는 일단 잘하는 사람을 추천하고 소개해서 일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줘도 부끄럽지 않을 실력을 갖추는 거, 추천해줄 만한 실력을 갖추는 게 필요하다. 대중음악 업계는 말하자면 부익부 빈익빈 사회다. 어떤 사람이 잘한다고 하면 너도나도 그 사람을 찾는다. 일이 많은 사람은 계속 많고, 적은 사람은 계속 적다.

-겨울연가 촬영 때 “제 곡 있는데 들어보세요”라고 감독에게 내민 게 그런 경우인가?

그렇다.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그때 내보일 수 있는 곡이 있어서 가능했던 거다. 즉흥으로 연주할 수도 있었겠지만 완성도에서 차이가 났을 거다. 사실 운도 굉장히 중요한 게, 내가 촬영장 갔을 때 연주해야 하는 곡이 이미 나와 있었다면 아마 인생이 달라졌을 거다. 그냥 대역 아르바이트만 하고 끝났을 테니까.

-좋아하는 영화음악이나 영화음악가는?

존 윌리엄스가 작곡한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 음악. 곡이 좋아서 악보까지 사서 봤다. 정말 재미있는 게 첫 곡이다. 멜로디 아래에 낮게 깔리는 음형으로 부엉이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이걸 모두 현악기만으로 연주한다. 빠른 속도에 작은 소리로 굉장히 민첩하게 움직인다. 이게 정말 어렵다. 마치 스메타나가 작곡한 ‘몰다우 강’에서 물결을 현악기들이 묘사하는 것 같은 기법이다.
[동영상] 영화 ‘해리 포터’ OST - Prologue

이런 건 실제 연주 때 현악기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가 어려워서 잘 쓰지 않는데, 과감하게 썼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더 놀라웠던 건, OST 연주가 정말 훌륭하게 소화해낸 거였다. 해리 포터는 워낙 대중적으로 인기 많은 영화라서 연주 버전도 다양하다. 그런데 그 수많은 실황 연주들이 원래 음반을 못 따라간다. 날아가야 하는데 날지 못하고 허덕이는 연주가 많다.(웃음)

다크나이트, 인셉션 등의 음악을 쓴 한스 짐머도 좋아한다. 음악 자체로 나서는 게 아니라 분위기를 정말 잘 잡는다. 기억에 남는 멜로디는 아닌데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굉장히 높여주는 음악이다. 그게 딱 할리우드에서 원하는 역할이다.

재미있는 게 이런 작곡가들을 보면 태생이 다르다. 한스 짐머는 원래 기타리스트, 신디사이저 등을 다루는 대중음악가로 출발했다. 반면 존 윌리엄스, 엔니오 모리코네는 클래식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특히 엔니오 모리코네는 음악 자체에 힘이 들어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많은 명곡을 남기고도 아카데미에서 상을 못 받았다. 음악 자체, 멜로디는 좋은데 영화에 쓰기엔 좀 강하다 싶은 게 많다는 얘기다.

그런데 한스 짐머는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다. 무심결에 흘려 듣는 사람은 ‘비슷비슷한 거 아니냐’고 하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콘셉트도 악기 편성도 다르다. 예를 들어 인셉션(2010)에서는 일반 편성 오케스트라를 쓴 게 아니다. 브라스(brass, 금관악기)를 60명 썼다. 마치 뱃고동 같은 음향을 만들었다.
[동영상] 영화 ‘인셉션’ 공식 트레일러

그런가 하면 우주를 표현하는 인터스텔라(2014)에서는 오르간을 쓴다. 마치 신디사이저 같은 느낌의 오르간을 사용해 미래와 우주를 표현한 거다.
[동영상] 영화 ‘인터스텔라’ OST -No Time For Caution

또 다크나이트 시리즈(2008~2012)는 스트링(string, 현악기) 주자를 100명 썼다. 현악기의 마찰음으로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동영상]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 OST- The Dark Knight Rises

그런 식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제대로 잡아주니까 영화감독이 선호하는 거다.

다른 영화음악 감독으로는 영화 ‘가위손’ ‘크리스마스의 악몽’의 데니 엘프만을 좋아한다. ‘토이 스토리’ 같은 애니메이션 음악도 즐겨 듣는다.

-우리나라 영화음악계에서는?


이병우 음악감독의 음악을 좋아한다.(‘장화홍련’ ‘스캔들’ ‘왕의 남자’ ‘괴물’ ‘해운대’ ‘관상’ ‘국제시장’ 외 다수) 이 감독의 영화음악에는 정말 그 사람만의 정서가 녹아있다. 음악을 듣다보면 그냥 밋밋하고 별 특징이 없는 곡도 많다. 그런데 이 감독은 늘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이 잘 드러나는 음악을 만들어낸다.
[동영상] 영화 ‘장화, 홍련’ OST - ‘에필로그’

-본인 곡은 어떤 편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뭐,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웃음)

-특별히 애착이 가는 곡이 있다면?

여러 곡이 있지만, 영화 ‘올드보이’의 우진 테마도 애착이 가는 곡이다. 영화음악으로는 처음 만든 곡이기도 하고. ‘현악기의 감성적인 사운드로 가는 왈츠’라는 확실한 주문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 영상을 보고 작곡하면서도 그렇게 잔인한 내용일 줄 몰랐다.(웃음)
[동영상] 영화 ‘올드보이’ OST- ‘Cries of whispers’(우진의 테마) (2003)

요즘 곡으로는 아리랑 콘체르탄테 앨범? 사실 녹음이 끝난 뒤엔 내가 작곡한 곡을 잘 안 듣는 편이다. 녹음하기까지 수백 번은 들으니 질려버린다.(웃음)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번 앨범은 지금도 듣고 다닌다. 이번 앨범은 비틀즈의 프로듀서였던 조지 마틴이 설립한 에어 스튜디오(Air Studios)에서 녹음했는데, 세계 유수의 뮤지션이 찾는 곳이다. 사운드가 정말 마음에 든다. 마치 좋아하는 다른 음악가의 음악을 일부러 찾아 듣는 것처럼 매일 듣고 있다.

또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도 재미있게 작업한 곡이라 기억에 남는다. 애니메이션도 영상을 보며 작업한다는 점에선 영화음악과 같은데, 정말 ‘대사’만 있는 영상이다. 영화에선 사람들이 말을 하더라도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라거나 바람 소리 등 여러 소리가 다 들어있다. 그런 소리와 음악이 어우러지는 걸 고려해서 쓰는 게 보통이다.

그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그런 ‘사운드’가 아예 없고 대사만 나온다. 심지어 그리다가 말고 넘어온 화면도 있고.(웃음) 그래서 영화에 의존하기보다 상상력을 훨씬 더 많이 발휘해야 한다. 사운드가 없는 만큼 음악이 더 큰 역할을 해야 하는 게 애니메이션 음악인 거다. 굉장히 재미있는데 안타깝게도 국내에선 극장용 애니메이션 자체가 별로 많이 제작되지 않는다. 관객 수가 적어서 그런데, 앞으로는 좀 더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다.
[동영상]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 OST - 바람의 멜로디 (2011)

-아리랑 외에 또 다루고 싶은 우리 음악은?

민요를 폭넓게 다뤄보고 싶다. 이번 앨범엔 ‘한오백년’을 넣었는데,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민요와 클래식을 엮어 대중적인 느낌으로 풀어내고 싶다. 사람들의 반응도 좋은 편이다. 그래서 8일 공연에는 육자배기라는 민요를 내 방식으로 풀어내 무대에 올린다.

-언젠가 이런 작품은 하나 쓰고 싶다 하는 게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고 쓴 게 사실 아리랑 프로젝트였다. 물론 아리랑이라는 주제 하나만 쓴다는 제약이 있긴 하지만. 앞으로는… 음악만 있어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공연장에서 한 30분 이상 울려 퍼질 수 있는 음악을 쓰는 거랄까.

-고객 요구에 맞추기보다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 싶다는 얘긴가?

그런 걸 겸하면 좋겠다는 얘기다. 영화음악은 끝까지 하되, 클래식을 할 때 시도했듯이 실험적인 음악이나, 아니면 어떤 종류가 됐든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쓰는 음악도 하고 싶다는 거다.

-현재 작업 중인 영화음악은 어떤 게 있나?

류승룡, 이성민 주연인 김광태 감독의 '손님'이란 영화의 음악 작업을 하고 있다. 7월쯤 개봉 예정이다.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앞으로도 영화음악을 열심히 하는 것은 물론, 한국의 고유 멜로디를 더 새롭게 해석하는 음악을 시도해 나갈 예정이다.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셨으면 한다.


작곡가 이지수/마이스터 뮤직 제공
작곡가 이지수/마이스터 뮤직 제공
◆ 이지수

영화음악 감독 겸 작곡가.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수석으로 입학. 대학 2학년 때인 2001년 드라마 ‘겨울연가’의 배용준 손 대역을 하러 촬영장에 갔다가 자작곡인 ‘처음’을 선보이며 대중음악계에 이름을 알렸다. 2003년 영화 ‘올드보이’의 우진 테마와 배경음악, 영화 ‘실미도’ OST 작곡으로 주목 받으며 영화음악계에서 활동 반경을 넓혀왔다.

현재 마이스터뮤직 소속 영화음악 감독 겸 작곡가. 명지대 음대 겸임교수로도 일하고 있다.

수상경력
2004년 제3회 ‘대한민국 영화 대상’ 음악상 수상 (올드보이)
2009년 제15회 '한국 뮤지컬 대상' 작곡상 수상 (기발한 자살여행)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수상 (전통예술부문)
2011년 부산 영화제 작곡상 수상(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
2012년 영화 평론가협회 음악상수상(건축학개론)

작품
KBS드라마 미니시리즈 <겨울연가(2001)> <여름향기(2003)> <봄의 왈츠(2006)> 작곡
영화 <실미도> O.S.T 작곡 / 체코 필하모닉오케스트라 연주 (2003)
영화 <올드보이>/ 우진(유지태) 테마 및 배경음악 작곡 (2003)
게임 (Nexon) 작곡 및 음악감독 (2004)
영화 <혈의누> 작곡 및 Orchestration (2005) / <안녕 형아>작곡 및 음악감독 (2005)
입체애니‘트리로보’(아이치 엑스포 한국관 주제영상) 작곡 및 음악감독 (2005)
아리랑랩소디 <체코필하모니 오케스트라> / 편곡 오케스트레이션 피아노 (2006)
영화 <친절한 금자씨> Orchestration (2006) / <만남의 광장> 작곡 및 음악감독 (2007)
뮤지컬 “기발한 자살여행”(쇼팩) 작곡 및 음악감독 (2008~2009)
LOEN & 문화관광부 국악 프로젝트 "MIJI” 작곡 및 음악감독 (2009)
뮤지컬 겨울연가 작곡 및 음악감독 (2011년 9월)
영화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 작곡 및 음악감독 (2011년 7월)
영화 <건축학개론> 작곡 및 음악감독 (2012년)
SBS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 작곡 및 음악감독
SBS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최후의 권력> 작곡 및 음악감독
영화 <마이 리틀 히어로> 작곡 및 음악감독 (2013년)
중국 영화 <선물> 작곡 및 음악감독 (2013년) CJ엔터테인먼트 투자 / 한 중 공동제작
영화 <톱스타> 작곡 및 음악감독(2013)
영화 <레드 카펫> 작곡 및 음악감독 (2013년)
SBS <8시 뉴스> 작곡 (2014년)
영화 <카트> 작곡 및 음악감독 (2014년)
영화 <빅 매치>작곡 및 음악감독 (2014년)

◆ 아리랑 콘체르탄데(Arirang Concertante) 콘서트

오는 8일 오후 8시 서울 서초구 역삼동의 LG아트센터에서 작곡가 이지수의 ‘아리랑 콘체르탄테’ 콘서트가 열린다. 지난달 30일 발매된 ‘아리랑 콘체르탄테’ 앨범의 수록곡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 소리꾼 김나니, 피아니스트 안종도, 대금 연주자 이용구, 소프라노 황수미가 출연한다. 지휘자 금난새가 이끄는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한다. 올드보이, 실미도, 건축학개론, 마당을 나온 암탉 등 작곡가 이지수의 대표곡으로 구성한 모음곡도 감상할 수 있다.

[인터뷰] 배용준 대역에서 시작된 인생의 새길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4/07/201504070219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