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큰 교회를 하면서도 아파트에 산다.” “성령이 강해서(?) 교인들이 아까운 줄 모르고 선교기금을 거침없이 내놓게 만든다.” “교회보다 선교지에서 지내는 날이 더 많다.”…내년이면 창립 20주년을 맞는 오렌지카운티에 있는 은혜한인교회의 김광신 담임목사(66)를 두고 교인들사이에서 오가는 말이다. 이틀전 소련에서 돌아 왔다는 김목사를 지난 3일(월) 어렵사리 만나 개인적인 성령체험과 목회비젼을 들어 보았다.

오렌지카운티 디즈닐랜드 바로 옆에 위치한 은혜한인교회의 김광신목사 사무실. 기자가 방문했던 여느 당회장 사무실과는 대조적으로 검소했다. 마주 앉은 방의 주인 역시 매우 소탈했다.

“실제로 이제까지 아파트에서 살았어요. 최근 아들이 나이들어서 집이 있어야 한다며 집 한채를 구입해 주었는데 얼마전 임자가 나서서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했는데 아직 짐을 풀지도 않은 상태지요.”

김목사가 굳이 아파트를 고집하는 이유는 목회자의 발목을 잡는 유혹이 ‘물질적 욕심’이라 생각했기 때문. 집이 있으면 자연히 그 안을 채우고 싶어지고 그러다보면 ‘물욕’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목사가 된 후 골프는 물론 흔한 노래방 한번 가본 적이 없다는 김목사는 ‘아는 것이 선교뿐’이라 재미없을 것이라며 ‘간단히’ 해달라고 부탁한다.

4대째 신자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정사정(부모가 12살 때 이혼)으로 어려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15세때 6·25가 터져 자원해서 입대했고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와 함께 살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산에 올라가 진지하게 기도를 했고 결과 ‘신은 없다’는 결론을 내린 후 42세(77년 8월19일 성령체험)까지 믿음없이 지냈다. 김목사는 성령체험의 날을 날짜까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71년 아르헨티나로 이민, 72년 다시 미국으로 온 김목사는 정원설계와 조경사로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가디나의 한인교회에서 성가대지휘를 했지만 믿음은 없었다. 교인과 비교인의 차이가 교인은 십자가 아래 숨어서 죄를 짓고 비교인은 밝은 대낮에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그러던 중 타주에 사는 자신과 가깝게 지내던 동서가 전도를 하겠다며 찾아왔다. 암선고를 받았는데 성령체험으로 병이 나았고 그것을 제일 먼저 믿지 않는 김목사에게 간증하려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 온 것.

“마침 그날 친구들이 집에 놀러왔기때문에 한 손엔 맥주캔을 들고 한손엔 담배를 든 상태에서 동서의 이야기를 대충 듣고 있었지요.”

그러던 중 문득 “절대로 성령타령( )을 하지 않을 저 사람을 저토록 변화시켰다면 정말 하나님은 있는 것이 아닐까 ”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덜컥 겁이 났다.

40년 넘도록 없다고 믿어왔던 하나님이 정말 있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지난 40년 세월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나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뭔가 세게 뒤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때 하나님이 있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긴박감이 엄습했고 그래서 들고 있던 맥주 캔과 담배를 집어 던지고 정말 당신이 있다면 내가 믿게 해달라고 나도 모르게 절규하듯 기도했어요.”

생전처음 30분을 기도한 것 같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실망하고 일어나 찾아온 친구들과 그날 밤 술을 마시며 놀았다.

그러나 다음날 평소와 달리 이상하게 새벽 4시 눈이 번쩍 뜨였다. 친구들이 자고 있어 마땅히 할일이 없었다. 문득 차속에 쳐박아둔 성경책이 읽고 싶어 마당에 나와 섰는데 어제의 것들이 아니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나무도 아침공기도 또 잠에서 깨어 일어난 아내의 모습도 그렇게 모두가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성경을 펼쳐들고 읽어내려가는데 쏙쏙 머리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없다고 믿어왔던 하나님이 웅대한 존재로 느껴지면서 그 앞에 자신은 볼품없는 물거품 같았다. 그리고 웬지 눈물이 자꾸 흘렀다. 물거품인 주제에. 이런 물거품을 그래도 기다려주고 받아준 하나님에게 미안하고 면목이 없어 눈물만 흘렸다.

그날이 바로 77년 8월 19일. 김목사가 다시 태어난 날이다.

일단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뭔가 해야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우선 성가대원 중에서 자신처럼 ‘대충 교회만 왔다갔다 하는’ 사람을 집으로 데려와 제대로 믿어보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즉 전도를 하기 시작 한 것이다.

“42살때 성령체험을 했으니 다른사람보다 마음이 바빴던 것이지요. 망설일 것도 없이 탈봇신학교에 들어갔고 졸업 후 47살에 미국교단(C.&M.A.)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3가족으로 은혜한인교회를 시작했지요.”

목회비전은 그때부터 선교였다. 그것도 남들이 힘들어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개척교회의 3가족에게 ‘우리 예산 중 50%는 무조건 선교비용’이라고 선언했다. 그것은 계속 지켜졌고 지금은 75%까지 됐다.


“선교는 교회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존재이유 그 자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김목사의 또 하나의 목회비젼이 ‘목회자가 스스로 물질적인 욕심을 끊을 때 신도와 교회가 물적으로도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처해서 가장 낮은 월급( )을 책정했고 아파트를 고집하게 된 것. 김목사는 나아가 ‘담임목사가 없이도 움직이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는 신념으로 90년부터 직접 선교지를 찾아 나섰다. 지금은 일년 중 10개월을 선교지에서 지낸다.

“최근 한 미국선교사가 자료를 보여주면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선교를 하는 교회가 우리 교회라고 하더군요. 일등 이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 목적은 우리 신도들을 이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게 해주는 것입니다.” 김목사는 그러기 위해서 지금 남미와 일본 선교에도 더욱 총력을 기울인다고 말한다.

김목사는 하나님을 만나 공짜로 얻은 것이 너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불치병이었던 아내(김영진사모·56)의 자반병이 나았고 생각지않았던 1남(34·의과대학생) 1녀(31· 한국 선교사)를 얻은 것이라고 말한다. 은퇴하면 더욱 선교에만 매달려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을 소련과 일본 등지에서 지낼 수 있다며 웃는 김목사의 모습은 이미 천상 상급을 받은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