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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남과 북서 적응못한 외로운 민족주의자!

Gwe 2012.07.13 18:14 Views : 2957

 
남과 북서 적응못한 외로운 민족주의자!


 
●민족화해지 2004년 5월 6일
장승학 효도회 및 한겨레평화통일협회 회장
-대담․ 정리 장영권 전 평화연대 사무총장

“남과 북서 적응못한 외로운 민족주의자”


비가 내린다. 나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누군가 버린 한 장의 신문을 응시하고 있다. 그 신문에는 희미하게 ‘북한 룡천역 열차폭발 사고’라는 큰 활자가 보였다. 비는 폭발사고 현장을 보라는 듯이 소리를 내며 신문을 두들기고 있다.
‘161명 사망, 1300여명 부상…’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끔찍할 일이 일어났다. 빗소리는 비명과 신음으로 치환되었다.
‘아, 너무 아파요. 살려주세요.’
룡천소학교 어린이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리가 귓전에서 울리는 듯하다. 순간 나는 북한에 두고 온 아버지와 어머니의 음성이 기억의 저편에서 솟아났다. 사고를 당한 북한 동포들의 절규가 한국전쟁 때 아들과 헤어진 나의 어머니 목소리 같았다.


‘승학아…승학아…’
나는 민족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1·4후퇴 때 평양의학전문학교 약학과에 다니던 나는 22살의 나이로 부모를 북에 남겨두고 홀로 남쪽으로 피신했다.

며칠 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지만 그 길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비에 젖은 룡천역 폭발 현장 사진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이 흘러 나왔다.

“공산당 군인(인민군)이 될 수 없다” 한국전쟁중 단신 월남

내가 1929년생이니까 어느덧 75성상을 살아왔다. 내 고향은 평안남도 중화이다. 지금은 평양시로 편입되었지만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황릉이 있는 곳이다. 중화는 내 육신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정신적, 사상적 고향이 된 곳이기도 하다. 중화는 한자로 가운데 중(中)자와 화합할 화(和)자를 쓴다. 즉 좌와 우의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모두를 아우르며 상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중학교까지 다니며 자생적으로 ‘중화사상’을 몸에 배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부유했다. 비록 지주는 아니었지만 1만2000평의 논밭을 아버지는 직접 경작했다. 북한 공산당이 들어선 후 토지개혁으로 가구당 최고 9000평으로 제한하여 3000평을 빼앗기긴 했지만 그래도 정미소와 수리조합까지 운영하고 있어 주변에선 소위 ‘부잣집’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아버지 장두칠(張斗七)씨와 어머니 박동춘(朴東春)씨 사이의 4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나를 ‘영원한 비극의 포로’로 만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소련의 사주로 남침을 단행하고 징집에 나섰다. 평양의학전문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나는 ‘군의관 중위 현역으로 입대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나는 북한 공산당체제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공산주의에는 반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산당 군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입대 예정일 하루전날 달아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 공산당 군대에 도저히 입대할 수 없어요. 차라리 도망가겠어요.”

나는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잠시 피해있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깊숙이 숨겨놓았던 금덩어리를 들고 나오셔서 반을 잘라 나에게 주셨다.

“승학아,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이걸 갖고 가거라.”
나는 허리춤에 잘 간직하고 한동안 평양에 숨어 있다가 1951년 1․ 4 후퇴 때 피란민 대열에 끼어 단신으로 인천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금괴 일부를 팔아 배를 빌려 인천 앞바다에 있는 ‘울도’로 피난 갔다. 그곳은 전쟁과 전혀 상관없는 놀라운 평화지대였다. 그곳에서 7개월여를 보낸 후 다시 인천으로 나왔다.

미군은 마침 전쟁물자를 하역하고 운반하기 위해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선발했다. 나는 평양에서 러시아어와 영어를 동시에 배운 덕에 미군부대에서 검수관 일을 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 계급 없이 공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1953년 7월 27일 3년 1개월에 걸친 악마같은 전쟁은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나의 고통과 민족의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고 또 다른 고통이 시작 되었다. 다시 보리라고 생각했지만 철책선과 총구가 가로막아 부모형제를 만날 수 없었다. 부모를 보고 싶은 그리움이 이산가족의 한이 되었다.


“어버지, 어머니 너무 그립습니다” 사무친 사부곡

“아버지, 어머니 어떻게 지내십니까. 너무 보고 싶습니다.”
남한 땅에서 북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외로움은 나도 모르게 북한에 있는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쳤고, 그것은 다시 부모에 대한 ‘효(孝)’로 자라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얼마 후 결혼을 하면서도 부모를 모실 수 없어 가슴이 시커먼 하게 타들어갔다. 나는 부모가 생각날 때 마다 북쪽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절만 하는 것이 멋쩍어 나중에는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 아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아내와 북녘을 바라보며 인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1960년 6월 나는 아버지가 주신 금괴와 전쟁중에 미군에서 일하며 번돈으로 응용화학업체인 ‘협성화학’을 세우고 사업을 시작했다. 내가 북에서 배운 것이 의약부분이었기 때문에 주로 파리․ 모기약을 주문생산으로 만들어 팔았다. 에프킬라, 에어졸 등은 내가 설립한 회사에서 납품한 대표적인 상품들이었다. 다행히 사업은 비교적 순탄했다.


그러나 나는 사업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긴 것이 부모에 대한 효였다. 나는 부모를 위해서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효도여행이었다. 1967년 1월 21일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옷을 한 벌씩 만들어 들고 부산행 대한항공기 좌석 3장을 끊고 비행기에 탔다.

“아버지, 어머니 즐거운 여행되세요.”
누가 보면 이상한 일이라 하겠지만 나로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졌다. 어린 아이처럼 울다울다 지쳐서 잠이 든 적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는 이산가족들중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클 것으로 생각하고 북쪽에 있는 부모를 생각하는 모임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1970년 3월 1일 비슷한 처지의 실향민들과 함께 북에 남긴 부모에 대한 불효를 속죄하는 뜻에서 ‘효도회’를 창립했다.

‘효는 생명이다. 그 속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이 삼위(三位)가 같이 함이며, 비로소 우주가 생하고 日月星辰(일월성신)과 만물이 있으니 부모님이 안 계셨으면 나도 없고 우주도 존재치 않는다.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고 효를 행함은 우주질서와 순화하는 것이며, 인류화평의 요소이다. 이 사랑이 충만한 효속에 부모자(父母子)가 같이 함이니 이는 삼위일체이고 우주근본의 진리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효도회 취지문 일부)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주자” 상봉운동 점화

나는 효도회를 통해 민간 차원의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맨처음 주장했다. 이 분야의 선구자이자 산 증인이 된 셈이다. 그해 10월 3일 개천절에는 효도회 이름으로 남산 자유센터에서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천만 이산가족 제1회 망향제를 개최했다. 그리고 이듬해 9월 26일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개최한 제2회 망향제 때는 무려 1만여명의 이산가족과 실향민들이 참여했다.

“손성필 북한 적십자회위원장에게 보냅니다. 우리가 남한 적십자사를 통해 한반도 평화통일고향 방문단 300명을 10월 27일부터 일주일간 평양으로 보낼 것입니다. 북측은 이에 적극 호응하여 이산가족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바랍니다.”

나는 북측에 고향방문단 방문 허용을 공개적으로 사상 처음 촉구했다. 박정희 정권의 통제로 한국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중앙일보 등에서 호외 10만부를 발행했지만 정부에 모두 압수당했다. 그러나 ‘아사히신문’ 등 외국 언론에서는 ‘대사건’으로 긴급 타전했다.

나는 이 일로 그 날 안기부에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당국 주도하의, 아니 실제로는 중앙정보부 위장기구였던 적십자사 대화사무국이 주도하는 이산가족 문제에 감히 민간인이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산가족 교류는 관의 전유물이었고 민간단체가 정부의 승인 없이 이산가족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였다.


“너, 이 자식 정신병자이지. 감옥에 가겠어, 정신병원에 가겠어.”

“난 멀쩡한데 무슨 정신병원이냐.”
“입원만 하면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당장 입원해.”
난 졸지에 한동안 정신병자로 몰리기도 했다. 안기부는 병원에서 퇴원시킨 후 6개월 동안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한 채 가택연금을 시켰다.

어떻든 북측에 대한 고향방문단 허용 촉구로 정부가 이산가족문제에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남한 적십자에서도 이산가족상봉 주선에 나섰고, 1973년5월 이후락이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 7․ 4 남북공동성명을 채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안기부와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안기부는 1974년 6월 서울대생들과 전혀 관계도 없는데 돌연 서울대생 유신반대 데모를 사주하고 대통령을 비방했다는 올가미를 씌워 나를 연행했다. 물론 나는 유신헌법의 부당성을 이야기하며 철폐를 주장했다. 소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몰려 긴급조치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조성우, 최열, 유근일씨 등도 안양교도소에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동지 여러분, 교도소장을 인질로 잡고 무기를 탈취하여 유신철폐를 요구합시다.”
교도내 일부 강경파학생들이 박정희 정권 타도를 위해 무장봉기 필요성을 역설했다. 순간 나는 잘못되면 학생들이 희생될 것 같았다. 당시 내 나이는 40대 후반이었고 이들은 20대초반이어서 대부분이 ‘아들뻘’이었다.

“여러분 유신헌법 철폐는 명분이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장봉기를 하는 것은 극히 위험합니다. 잘못 하면 여러분 모두가 죽을 수 있습니다. 제발 진정하고 밖에 나가거든 다시 싸웁시다.”

안양교도소 소요가 일어나려 했지만 나의 설득으로 다행히 조용해 졌다. 그러나 당국은 이 일이 있은 후 학생들을 전국 각지의 교도소로 분산시켰다. 나도 대구교도소로 이송되었다가 1978년 8월 15일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나는 5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로도 줄곧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매달려왔다. 지금은 효도회에서 일반인의 이산가족 상봉도 주선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업무의 특수성 때문에 비밀을 유지할 수 있는 지인들을 중심으로 생사 확인이나 서신 교환 그리고 제3국에서의 상봉을 은밀히 주선했다.

나는 회원이 3200명까지 불어난 효도회를 중심으로 해마다 8월15일 임진각에서 합동 제사를 지내는 한편, 더 나아가 실향민들의 북쪽 가족 찾아주기 운동에도 직접 나서고 있다. 지금까지 생사를 확인해준 이산가족수가 300여명은 족히 된다. 내가 본격적으로 이산가족 찾아주기운동에 나선 것은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부터다. 지금까지 수십명의 실향민들에게 북쪽 가족들의 편지와 사진을 전해줬다. 나도 1993년 12월 초순 황해남도에 내 ‘동생이 살고 있다’는 꿈같은 사실을 생생한 사진과 함께 편지로 받아보았다.


“형님, 살아 계시다니 꿈만 같습네다. 그러나 형님이 애타게 찾으시던 아버지는 1972년에 작고하셨고, 어머니는 1991년에 돌아가셨오.”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그토록 찾았건만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돌아가시다니…. 나는 한동안 망연자실한 채 어찌할 줄 몰랐다. 나는 그 편지를 부여잡고 얼마나 통곡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이산가족 찾아주기 운동은 그치지 않았다. 1994년에는 효도회를 이산가족상봉 주선 민간단체로 통일원에 정식 등록하면서 이른바 제도권 속으로 진입했다. 또 아들과 함께 무역회사를 운영하면서 압록강 너머 신의주가 바라다 보이는 중국 단둥과 베이징에 의류 임가공공장을 세운 데 이어, 1996년 초에는 베이징에 ‘남북이산가족상봉센터’를 설치해 이산가족들의 재북 가족 소식을 전해주기 시작했다. 바로 정주영 회장 등 이북 출신 기업인들과 월북한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 등이 나를 통해 방북 초청장을 받거나 제3국에서 가족과 극비리에 상봉하기도 했다. (그후 오익제씨의 월북은 나의 뜻과는 전혀 달랐다.)

고 정주영 회장 방북 초청장 발급 주선

“차라리 내가 소였다면….”
1998년 6월 16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동생들과 자식들 그리고 소 수백 마리를 데리고 판문점을 통해 역사적인 방북을 하는 광경이 TV를 통해 비쳐졌다. 어느 누구는 ‘소몰이 방북’을 연출한 정 회장을 “감히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작품을 창작한 전위 예술가와 다름없다”면서 “이것이 바로 문화의 발상이며, 문화의 힘”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금같은 소선물을 싣고 당당히 금의환향하는 그의 모습은 나를 포함하여 수많은 실향민과 이산가족들에게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주기도 했다. 실향민 차원에서 보면 북한이 조금씩 열리어 고향에 갈 수 있다는 기대감과 살아생전에 나도 과연 갈 수 있을까하는 절망감이 교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리라 소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가져보았다.


나는 정 회장의 금강산 사업만큼은 기업가의 이윤 추구가 아닌 효심의 발로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나는 정주영 회장 일가의 방북 초청장을 북한 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로부터 받아주게 하는 데도 기여했다.

1995년 2월이었다. 당시 나는 중국에 자주 드나들며 북한 인사들을 만나 이산가족 상봉이나 편지교환 등을 주선하고 있었다. 북한 관계자들과 어느 정도 선이 다아 있어 일종의 방북 로비스트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통일부에서도 북한을 방문하려면 나를 통해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정주영 회장도 통일부에 알아본 결과 나에게 연락을 해보라고 한 모양이었다. 정주영 회장실로부터 전화가 왔다.


“장승학 효도회 회장님. 정주영 회장께서 좀 뵈었으면 합니다. 계동 현대사옥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나는 전화를 받고 정 회장 방에 갔다.
“장 회장님, 나는 정말 고향이 그리워요. 죽기전에 꼭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북한 방문의 초청장을 받아줄 수 없겠어요.”

정 회장은 본인과 형제자녀 그리고 수행원을 대동하고 고향 강원도 통천을 방문하여 친척을 상봉하고자 하니 초청장 발급을 주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현대그룹 명예회장 직인이 찍힌 의뢰서와 첨부할 가족 신상명세서를 내게 주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괘씸죄로 ‘미완의 방북 준비물’이 되었지만 정 회장의 의뢰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효도회 장승학 회장님. 본인은 본인과 형제, 본인의 자녀, 그리고 약간명의 수행인을 대동하고 고향을 방문하여 친척들을 상봉하고자 하오니, 조속한 시일 내에 고향 방문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초청장 발급을 주선하여 주실 것을 의뢰합니다. 1995. 2. 27.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
지금이야 금강산사업으로 북한 지도부와 ‘직거래’하지만 그때는 정 회장이 ‘1992년 대선 출마죄’로 단단히 핍박받던 김영삼 정부 시절이라 사업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고 이산가족으로서 죽기 전에 고향을 방문해 친척들을 만나겠다는 취지였다. 물론 정 회장의 내심에는 금강산 사업 구상이 있었겠지만 당국, 아니 김영삼 정부에게는 이를 내비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로부터 두세달 후에 아태 김용순 위원장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아 정 회장에게 전달했다. 정 회장이 그때 사례비로 1억5000만원을 주었다. 나는 마침 북경의 한 호텔에서 만난 북측 고위인사의 간절한 요청이 생각났다. 모두가 잠든 새벽녘이었다.

누군가 방문을 조용히 노크하며 나를 불렀다.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하자, 그는 자기를 나에게 소개하여 말을 이어갔다.
“장 선생님, 도와주시라요. 북한의 어린이들이 우유가 없어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네다. 심각한 식량난으로 산모들이 영양실조에 걸리고 젖이 나오질 않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죽어가고 있습네다. 어떻게 남쪽에 돌아가시거든 도울 방법을 찾아보세요.”

나는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받은 돈을 모두 1997년 대북 식량 지원하는 데 썼다. 당시 적십자사에서 대북 지원 지정기탁을 받을 때 고향 평남 중화에 분유와 옥수수기름 등을 전달했다. 분유는 1만통 분량인데 (옥수수기름90,000ℓ) 트럭으로 13대분이었다.

그런데 정 회장은 그 초청장으로 끝내 고향에 가지 못했다. 1995년 통일원 장관이 한완상 장관에서 나웅배 장관으로 바뀐 뒤였는데 통일원에선 남북 대화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도 정 회장의 고향 방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속 좁은 김영삼 대통령이 정 회장에 대한 괘씸죄를 적용해 끝내 방북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때 방북을 허용했더라면 금강산 뱃길이 4년은 더 일찍 열렸을 것이고 금강산사업도 훨씬 더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전부터 정주영 회장과 안면이 있었지만 계동 사옥에서 오래 얘기하면서 서로 ‘백행의 근본은 효’라는 점에서 의견일치를 보았다. 나는 정 회장의 부와 명예가 아닌 바로 그 효심 때문에 존경심마저 갖게 되었다. 나는 이산가족의 한은 바로 불효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민족 통일의 철학은 효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정 회장은 하늘이 내린 효자다.

정 회장은 내게 방북 초청장을 받고 나서 계동사옥에서 다시 만났을 때 현대의 대북 투자는 절대 이익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효심에 감복했다. 젊은 시절의 사업가 정주영이라면 모르지만 이미 모든 것을 이룬 나이기에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그때 정 회장이 내게 밝힌 금강산 사업 구상은 하늘이 시킨 것(天孝)이라고 생각했다. 그 효심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의 마음을 모두 움직여 38선을 뚫은 것이다. 금강산 개발은 정 회장에게 약속한 김일성의 유훈이고 김정일은 그 유훈을 따른 것이다. 나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이 합심하고 거기에 김정일까지 협조하면 우리 세대에 반드시 평화통일의 돌파구가 열릴 것이라 확신했었다.


정주영 회장과의 이런 인연 덕분에 나는 1998년 11월18일 첫 출항한 금강산 유람선 금강호의 최고급 객실에서 묵으며 정 회장과 함께 금강산을 다녀왔다. 이번에는 정 회장이 같은 이산가족인 나를 배려한 것이다. 나는 그 후로도 10여 차례 이상 금강산을 다녀왔다.

오익제 교령 월북 배후 조정자로 몰려 홍역

나는 16대 대선을 앞두고 1997년 8월15일 월북한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과의 인연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당시 안기부에서 나를 오 교령 월북의 배후 조종자로 엮기 시작한 것이다. 오 교령의 고향이 나와 같은 평남 출신이어서 가깝게 지낸 대다가 그의 부탁으로 내가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의 편지와 사진을 전해준 것이 이유였다.

안기부는 나를 불러 신문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오익제씨의 월북을 사전에 알았지요?”

“무슨 소리요. 오익제 교령이 김 총재 만난 얘기를 나한테 다 했소. 오교령이 김대중 총재보다는 나와 더 친한데, 나한테도 북한 간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DJ한테 할 리가 있겠소.”

나는 5~6차례 조사를 받으며 시달렸으나 공안당국에서도 무리라고 판단했던지 더 이상 문제 삼지는 않았다. 나중에 이른바 오익제 편지사건은 안기부의 조직적 개입에 의해 부풀려진 이른바 ‘북풍 공작’의 산물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런데 오교령이 월북하기 전에 내 사무실을 찾아온 적이 있는데 당시에도 이상하게 생각했던 점은 다른 때와 달리 나갈 때 내게 두 번이나 인사를 했다. 마치 어디 멀리라도 떠나는 사람처럼….

나는 오익제 교령과 유미영씨를 만나게 해주었지만 가족들을 만나게 해주지는 않았다. 유미영씨를 만났을 때 오교령 가족의 생사를 확인했다. 그래서 나는 그 뒤에 오 교령 가족의 편지와 사진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오 교령이 딸과 사위를 만났다고 했다. 오 교령은 중국에서 가족을 만나고 나서 부인이 재혼도 하지 않고 노모를 40년 이상 봉양해온 사실을 알고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 후 오 교령은 계속 노모에 대한 불효와 부인에 대한 자책감에 시달려 왔다. 지금도 나는 그의 월북이 개인적인 동기 즉 효심에 따른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오익제 월북사건도 근원적으로는 이산가족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민족주의자인 오 교령이 사상 문제로 월북한 것이 아니고 이산가족으로서 가족이 보고 싶어 월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몇 해 전 한 언론(신동아 1999년 11월호에 보도)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 민족이 지향해온 민족주의는 홍익인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철학적 바탕 위에서 화해와 평화통일을 지향해야 하는데 화해의 첫걸음은 이산가족의 한 풀이부터 시작해야 한다. 분단의 뿌리가 극우·극좌 이데올로기이고, 6·25 전쟁이 이산가족 양산의 주범이기 때문에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 민족 화해의 첫걸음이다.”

소위 이산가족 1세대에 해당하는 나는 고령층 실향민들의 가족상봉을 위해서 34년간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 어려울 때는 기도의 힘으로 위로하고 ‘이산가족 상봉 주선사업’을 나에게 부여된 천직으로 받아들이고 이 일에 힘을 쏟아왔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어 안타깝다.

금강산은 한반도 통일을 여는 ‘눈’

나는 1987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재야단체적 성격이 짙은 ‘한겨레 평화통일협회’를 주도적으로 창립했다. 처음엔 ‘한민족 평화통일운동본부’라는 이름으로 창립했지만 1994년 개칭하고 사단법인화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창립 이래 효도회와 함께 △한라에서 백두까지 통일 대행진 △한민족 평화통일 40일 기도회 △한민족 평화통일 임진각 대회 △강화도 마니산 통일촉진대회 △백두산 △적십자를 통한 북한구호품 전달 △금강산 망향제 실시 △금강산 통일효도관광 실시 △해외동포 민족교육과 이산가족 위안행사 등 ‘통일된 민족의 무한한 미래’를 향한 한겨레 평화통일협회의 활동은 앞으로도 한민족의 하나됨을 위한 현실적인 노력을 멈추지 않도록 할 것이다.

나는 금강산 뱃길이 열린 후 처음 맞는 추석인 지난 1999년 9월 24일에도 효도회원들과 함께 금강산에 다녀왔다. 금강산에서 망향제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2년전인 2002년 6월 15일 에도 금강산에서 북측대표들과 만나 한국전쟁에 대해 설전을 벌인 일이 있다.

“한국전쟁은 북한이 분명 남침을 했지만 소련의 사주와 미국의 유인에 의해서 촉발된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전쟁의 실질적 책임은 미국과 소련에 있다. 그런가 안 그런가.”
북한 대표들은 나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역사를 새롭게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통일은 우리끼리 해야 한다.”
나는 최근 빈번한 남북교류속에 평양을 몇 번 다녀왔다. 놀라운 일은 내가 평양의전에 다닐 때 살던 집이 없어졌다. 근처에 주체사상탑이 우뚝 섰고, 우리집터는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개성평양간 고속도로가 달리고 있다. (내가태어난 중화군 우리집은 개성 평양간 고속도로 옆인데 나의 옛집도 없어졌다)

북쪽에 나의 다섯 동생과 조카들까지 23명이 살고 있고, 남쪽에 자녀(2남2녀)와 손자 등 16명이 살고 있다. 나는 북쪽 형제들에겐 장남이어서 맏형이자 큰아버지이고, 남쪽에선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이다. 내가 살아생전에 이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빨리 오길 기다린다.

나는 북에서 태어났지만 공산주의를 택하지 않고 남으로 왔다. 그리고 나는 남쪽의 자본주의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평생을 방황해 왔다. 나는 고향의 정신 즉 중화(中和)정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독실히 믿고 좌와 우에 치우치지 않는 민족주의자의 길을 걸어왔다고 자부한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육신의 아버지를 존경하는 외로운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은 고통을 당한 민족이다. 좌와 우를 아우르며 민족을 구원할 제3의 철학이나 사상을 누군가 개발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충분히 그러할 수 있고,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계역사의 구원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오늘도 나는 우리 민족이 분단을 빨리 종식시키고 자주통일국가로 잘 살아보았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기도하며 그 날을 간구한다.


◇장승학 회장 주요 이력
△1929. 12. 26 평남 중화 출생 △평양의학 전문학교 약학과 수료 △1950. 6. 25중 월남 △협성화학 사장 △명지화학 회장 △효도회창립(1970.3.1) 회장 △경모회 회장 △1974. 유신헌법 반대로 5년간 복역 (대통령 긴급조치 1호, 4호 등 위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공동의장 △현 (주) Nobby Korea 회장 △현 화성산업 회장 △현 사단법인 한겨레평화통일협회 이사장 △현 남북이산가족교류협의회 상임의장 △현 효도회 회장
외로운 민족주의자의 한(恨)
1. 내가 부르짓는 민족주의자의 설땅은 22만평방키로미터중 단 한평의 설자리가 없다

2. 나의 민족주의는 남북의 통일 뿐아니라 만주땅까지 신삼국이 통일되어야 한다
1945.8.15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고 4338.10.3로 복원되야 한다

3. 지금까지의 주변 강대국의 1300년간의 지배에서 벗어나 고구려의 옛땅과 정신을
다시 찾아야 우리민족이 동북아세아의 평화를 유지 할수있다고 본다

4. 남북의 현 강대국을 배경으로한 분단 정권은 민족앞에 서로 반성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제3의 통일 광복을 이루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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