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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 제기되는 물음

 

의심 없는 신앙은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 부모 잃은 아이들의 눈망울, 사랑하는 사람을 목 놓아 부르는 울부짖음,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주저앉아 하늘만 쳐다보는 멍한 모습들을 떠올리며, 상념들을 정리해 본다. 최근에 발생한 대지진과 쓰나미로 아시아와 일본 등지에서 한꺼번에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간의 역사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되었고 종교라는 미명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말세의 징조인가. 나와는 상관이 없는 남의 일일까. 내 자신이 당한다면, 그래도 고난은 별 것 아니요 축복이라는 말은 어디까지 사실인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으로 인하여 또한 자연현상으로 벌어지는 참혹한 비극 앞에서 ‘신은 선하며 자비롭고 정의로우며 전지전능하다.’라고 마음 편히 말할 수 있는가. 당신 자신에게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언제까지나 인내하며 신의 이름으로 감사하다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바로 당신 주변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모습을 수두룩하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즉시 삶을 통해 그들과 함께 괴로워하며 도움을 주어야 한다. 혹시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을 단순히 당신의 위로자요 성공자로 이용하지 말 것이며,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절벽에 서게 될 것이다.

물음은 신앙 없음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하나님께 묻기를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을 잘 알 수가 없다. 심각한 물음과 마주 친 순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이런 물음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신이 완벽하게 선하다면 신은 악을 물리쳐야만 한다. 만일 신이 무한히 강하다면 신은 모든 악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악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신은 완벽하게 선하지 않거나 혹은 무한히 강하지 않다.’ ‘그렇게 많은 악을 허용하는 하나님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것보다 더 단순하고 명료한 표현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신 믿음에 대한 반대 논증은 대단히 방대하고 난제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2. 신정론 또는 변신론

 

먼저 방어와 신정론은 분명히 구분된다. 방어는 악에 근거한 특정 논변 형식이 실패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에 목표를 둔다. 반면에 신정론은 신이 고난과 악을 허용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악의 문제와 이를 해결하려는 모든 노력들을 총체적으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 하며, 가끔은 악고론(惡苦論)으로 부른다. 헬라어로 신을 의미하는 데오스(theos)와 의로움을 의미하는 디케(dike)로 이루어졌고, 악의 실재에 직면한 신의 의로움과 공평하심(the justification of God)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악의 근원에 대한 책임자로 고발당해 이성의 법정에 서있는 하나님을 방어하려는 변호절차로 비유되므로, 신정론은 변신론(辯神論)이라는 개념으로도 번역된다.

그러나 신정론과 신정론들이라는 말을 악의 문제에 대한 조직적 탐구와 그 해결책의 모색들이라는 의미에서 쓰기 시작하자마자 반대와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신정론이나 변신론이 불경스러운 단어라는 것이다. 인간의 잣대로 신의 행위를 재단할 수 있다는 환상아래 인간 피조물의 어리석은 자만을 나타낸다는 비난이다. 인간에 대한 신의 행위들을 정당화하려 하는 것 대신에 신에 대한 인간의 죄 된 행위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신의 그 무한한 주권과 통치권 앞에 침묵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말한다.

분명히 악의 문제는 불경스런 방법이나 비종교적 전제들로부터 접근이 될 수도 있으나, 동시에 가장 겸손하고 신실한 방법으로 기독교 입장에서 다루어질 수도 있다. 탐구의 정신은 당연히 개인과 개인이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사람들은 그 탐구를 하는 사람의 개인적 태도가 무엇이건 간에 이 주제에 대한 탐구가 종교적으로 부적절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신을 정당화하려 하는 것, 이해하려는 것 그 자체가 인간에게는 비종교적 행위라는 지적이다.

물론 신정론은 있을 수 없고 또한 우리의 정신과 양심을 만족시키는 악의 문제에 대한 합당한 사유방식은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 이성도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이것을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다른 사람이 하는 신정론적 시도들을 막아 버리는 것 또한 올바르지 못한 행위이다. 고난과 악의 문제는 신음하고 절규하는 실재에 대한 문제이며, 이럴 때마다 밝혀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선함을 신앙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이다.

 

3. 악의 종류와 착각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죄(sin)의 개념이다. 죄는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악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악이 죄는 아니다. 죄의 문제는 악의 문제에 포함되지만, 악의 문제는 죄의 문제보다 더 포괄적이다. 그러므로 악이라는 큰 개념 속에 포함되어있는 다양한 차원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악에는 우선 형이상학적 악(metaphysical evil)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결여라는 근본적인 측면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의 존재론적 차이에 근거하는 본질적인 유한성, 제한성, 불완전성을 의미한다. 존재의 충만성을 온전히 소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며, 피조물은 예외 없이 존재의 결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렇게 규정된 형이상학적 악은 비록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삶을 억누르는 두 가지 형태의 다른 악이 도출된다. 하나는 도덕적 악(moral evil)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적 악(natural evil)이다. 도덕적 악은 상대적 자유의지를 가진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유발시키는 모든 패역함의 현실을 지칭한다.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에서 인간이 자행하는 모든 죄가 여기에 속한다. 자연적 악은 인간의 의지와 행동의 개입 없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형태로 경험되는 악을 총칭하는 개념이며, 질병과 사고, 자연재해 등이다. 물론 질병과 기후 등의 자연적 악이 상당부분 도덕적 악과 무관하지 않다.

많은 경우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악들과 직간접적으로 마주칠 때 보이는 자세는 이렇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의 만사가 다 만족스럽다는 입장과 만사가 종국에 가서는 만족스럽게 될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조화(ultimate harmony)에 의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전지성과 도덕적 완전성을 근거로 하면서, 모든 인간의 도덕적인 판단들을 무력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이 실제로 겪고 있는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신은 고난과 악을 잊고 싶어서 또한 마지막 희망이라도 놓지 않으려고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 아닌가.

우리 기독교인들은 알게 모르게 고난과 악을 축복으로 여기도록 배워왔고, 그것이 신앙수준의 절대척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경우에는 맞는 말이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이 너무도 심각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작은 어려움이라도 닥치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그랬다.’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논조가 난무하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당신 때문이 아닌가? 하나님의 선하시며 자비하시고 정의로우시며 전지전능하심을, 하나님을 범죄자로 만드는 경거망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종교를 심리적이고 정신의학적인 마약으로 전락시킬 따름이다. 그런 위선과 착각은 결코 고난과 악의 해결책이 아니다.

 

4. 성경적 고난이해

 

고난과 악이 문제가 되는 것은 거기에 고통, 즉 괴로움과 아픔이 따르기 때문이다. 고통은 의학, 심리학, 사회학, 철학, 그리고 신학적 용어로 다양하게 묘사될 수 있다. 「국제 고통학회」의 정의도 그렇고 일반적으로 고통은 다른 사람이 겪는 것과 다른 주관적 체험이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불쾌한 경험이다. ‘번영신학과 고통의 신학에 대한 성명서’는 고통은 하나님의 본래의 뜻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통의 다양한 의미들은 그 나름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고통을 어떻게 수용하고 극복하며 살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성경은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서양식의 합리 일변도나 동양식의 응보론 위주로 접근하지 않는다. 물론 두 가지 접근방식 모두 조금씩 발견되기는 하지만, 어느 한 방식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성서에서 고난이라는 단어로 많이 사용되는 히브리어 아말, 헬라어 파테마는 동사에서 온 명사들이다. 동사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고통은 타락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구원이 완성되기까지의 사이 기간의 현재적 삶에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에 의해 악의 나라가 근본적으로 약화되었지만 우리는 죄와 구원 그리고 거기서 오는 결과들이 현존하는 두 시대의 사이에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고난 중에서 체험된 것으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부정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보호를 계속 받을 때만이 믿음의 긍정으로 극복된다. 고난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동시에 고난의 내적 의미를 생각하고 고난으로부터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때에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고난에 대한 모든 기독교적 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인 생각을 집대성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확하고 적극적인 성찰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십자가는 고난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의 열쇠이다.

그래서 고통은 커다란 신비라고도 하지만, 그 신비의 일부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현시로서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계시되었다. 하나님이 정말 사랑이시라면 우리 스스로 그 사랑을 음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삶에서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그저 하나님에 대해 더 배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가장 큰 사랑의 표시는 가장 최선이자 최후의 것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운명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발견해야만 한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그의 찢어진 살 틈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모든 것이 흠뻑 젖었다. 하지만 이런 섬뜩한 고난을 통해 승리를 이루었을 때 사람들은 자유를 얻었다.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것이 성부 하나님께는 어떠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당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고통당하는 자들을 찾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입으로만 부르심을 받았다고 떠들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을 실제로 살아갈 때에 가슴으로 예수를 발견하고 몸으로 예수를 따라가는 신앙의 진정성이 확인되는 것이다.

 

5. 고난에 참여하는 신앙

 

고난과 악의 문제는 무신론의 반석이며, 그것이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위태롭게 하는 지진과 쓰나미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막 15:34)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처절한 절규를 들으며, 온몸이 찢겨 피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당신은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의 소원을 성취해주고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떼를 부리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뜻을 묻겠습니까?

죽을 만큼 힘든 삶의 고난을 겪으며 그 캄캄한 어둠의 터널에서 하나님께 진지하게 물어보셨습니까?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그것에 대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에 있습니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5:32~36)

고난 없는 영광을 바라십니까? 고난이 자신 때문인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연유인지 분별하셨습니까? 부끄럼 없는 진솔한 고백이 될 때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의미 있는 영광의 고난이 됩니다. 고난은 겪어 본 자만이 아는 것이라지만,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들먹이는 착각과 무지의 신앙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내가 겪는 고통과 슬픔, 세상의 온갖 비극과 참사는 축복인가 저주인가? 은혜인가 심판인가? 이렇게 많은 고난과 악을 허용하는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선하시며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시며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이 맞는가? 도대체 왜 인간의 처절한 절규에 무심하게 하나님의 침묵만이 있는가? 먼저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로 하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하며, 그럴 때에 영광이 있습니다. 고난없는 영광만을 생각하거나 말하는 자는 가짜입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고 진정으로 물어 보십시오. 당신의 깨끗한 작은 눈물방울이 하나님의 가슴을 두드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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