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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Admin 2012.01.18 05:55 Views : 3666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요점 정리

작자 : 톨스토이

1.

한 구두장이가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어느 농부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는 집도 땅도 없이 오직 구두 짓는 일만으로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빵값은 비싸고 품삯은 보잘 것 없어 버는 족족 입에 풀칠하기 바쁜 형편이었다.

그에게는 아내와 번갈아 가며 입는 외투 한 벌이 있었는데, 이젠 그것마저 낡아 누더기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는 2년 전부터 양가죽을 사서 외투를 새로 만들어야겠다고 별러 오고 있었다.

가을로 들어서면서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아내의 손지갑에 모셔놓은 3루블 외에도 이웃에꾸어준 돈이 5루블 20카페이카쯤 되었던 것이다. 구두장이는 양가죽을 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마을에 갈 채비를 했다

아침밥을 먹자마자 루바시카(*러시아풍의 남자 웃저고리)위에 아내의 무명 내의를 껴입고 그 위에 다시 모직 외투를 걸친 다음, 그는 3루블 지폐를 속주머니에 넣고 나무막대를 지팡이 삼아 집을 나섰다.

'꿔준 돈 5루블을 보태서 양가죽을 사야지.'

마을에 이르러 그는 한 농부의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주인이 외출중이라, 그 집 마누라에게서 1주일 안에 돈을 마련해 주인편에 보내겠다는 약속만 받고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으로 찾아간 농부는 하늘에 맹세코 지금은 돈이 없다면서 장화 수선비라며 단돈 20카페이카를 내놓았다.

구두장이는 하는 수 없이 외상으로나마 양가죽을 사 보려고 했다. 그러나 가게 주인은 어림없는 소리 말라는 듯 잘라 말했다.

"돈을 갖고 오슈. 그럼 달라는 대로 주지. 외상값 받아내기가 얼마나 힘든지 넌덜머리가 난다니까."

구두장이는 결국 장화 수선비 20카페이카와 어느 집에선가 낡은 털장화를 꿰매는 일감 하나를 얻었을 뿐 헛수고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속이 상해 20카페이카를 몽땅 털어 보드카를 마셔 버리고는 양가죽은 만져보지도 못한 채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꽤 추운 것 같았는데 술을 한 잔 걸치고 나니 털외투 없이도 몸이 따뜻했다. 그는 걸어가면서 한 손에 든 지팡이로 꽁꽁 얼어붙은 땅을 두드리고, 다른 한 손으론 낡은 털장화를 휘둘러 대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외투 같은 것 없어도 따뜻하기만 하네. 겨우 한 잔 걸쳤을 뿐인데 요렇게 후끈후끈한 걸.

까짓 털가죽옷 따윈 필요없다구! 이 몸은 이런 분이다 이거야! , 그렇고 말고. 그깟 모피 외투 없어도 이 몸은 얼마든지 살 수 있다구! 그런 건 평생 필요없다 이 말씀이야! 그런데 마누라가 가만있지 않을걸. 이건 좀 골치 아픈데. 빌어먹을. 남은 죽어라 일해 주는데 이건 콧방귀만 뀌고 앉았으니! 어디 두고보라지. 이번에도 돈을 갖고 오지 않으면 모자를 날려 버릴 테니까. 암 그러고 말고. 도대체 어쩌자는 수작들이야! 고작 20카페이카를 줘? 그걸로 뭘 하라는 거야, 도대체? 술 한잔이면 날아가 버릴 돈을 가지고! 그래, 너희들만 곤란하고 난 곤란하지 않다는 거야? 너희들은 집도 있고 가축도 있어. 하지만 내겐 맨몸뚱이뿐이라구. 너희들은 농사지어 빵을 얻지만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사다 먹어야 한다구. 어떻게 버둥대든 빵값만도 1주일에 3루블은 치러야지. 집에 돌아가 빵이라도 떨어졌으면 당장 1루블 반을 써야 된다구. 그러니 내 돈을 갚아 줘야겠어."

이윽고 구두장이는 길모퉁이의 작은 교회 근처에 이르렀다. 그때 교회 뒤에서 뭔가 허연 것이 보였다. 이미 날이 저문 뒤라,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았지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쯤에 돌 같은 건 없었는데, 소인가? 하지만 짐승 같지는 않은걸. 머리를 보니 사람 같기도 한데 너무 하얗군. 하긴 사람이라면 이런 데 있을 리가 있나.'

그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제야 그 물체가 또렷하게 보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인 건 분명한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남자는 벌거벗은 알몸인 채 차디찬 교회 벽에 기대어 꼼짝을 않고 있었던 것이다. 구두장이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누가 이 자를 죽여 옷을 몽땅 벗기고는 여기 내다버린 모양이군. 근처에서 어정거리다간 무슨 변을 당할지도 몰라.'

구두장이는 그곳을 그냥 지나쳤다. 교회 모퉁이를 돌아가자 남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교회 앞을 지나면서 힐끔 돌아보니 남자가 벽에서 몸을 일으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이쪽의 거동을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구두장이는 겁이 더럭 나서 생각했다.

'다가가 볼까, 그냥 지나쳐 버릴까? 공연히 다가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면? 저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터에 말이야. 좋은 일 하고 이런 데 버려져 있을 리도 만무하고. 어쩌면 내가 접근하길 기다렸다가 달려들어 목을 조를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당하는 수밖에. 설사 목을 조르지는 않는다 해도 뭔가 시끄러운 꼴을 당할 게 뻔해. 저벌거숭이를 어쩐다? 내가 입고 있는 걸 홀랑 벗어 줄 수도 없고. 오 하나님, 제발 무사히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머리 속에 그런 생각들을 굴리며 구두장이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교회를 거의 지났쳤을 무렵 갑자기 양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길 복판에 멈춰 서서 중얼거렸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세몬? 사람이 재난을 만나 죽어가고 있는데 겁을 집어먹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려 하다니. 네가 무슨 큰 부자라도 된다는 거야? 그래서 가진 걸 빼앗기게 될까봐 겁이라도 난다는 거야, 뭐야? 세몬, 그건 옳지 않은 짓이야!'

결국 세몬은 발길을 돌려 남자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2.

세몬이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남자는 아직 젊고 제법 힘도 있어 보였으며 몸에 얻어맞은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추위 때문에 몸이 꽁꽁 얼어붙은 데다 몹시 겁을 먹고 있는 듯했다. 그는 벽에 기대앉은 채 세몬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너무 지쳐서 눈을 뜰 기운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세몬이 바짝 다가가자 남자는 그제야 눈을 뜨고 세몬을 쳐다보았다. 세몬은 그의 눈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털장화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벨트를 끌러 장화 위에 던진 다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으면서 말했다.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야! , 이거라도 입어보라구! 어서!"

세몬은 남자의 팔을 부축해 일으켰다. 일어선 남자를 보니, 훤칠한 몸매에 손과 발은 깨끗하고 얼굴빛도 온화한 젊은이였다. 세몬은 그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주었다. 그러나 팔이 소매 속으로 잘 들어가지 않았다. 세몬은 청년의 두 팔을 외투 소매에 끼워주고 옷깃을 잡아 당겨 앞을 여민 다음 허리띠를 둘러주었다. 그는 쓰고 있던 낡은 모자도 벗어서 청년에게 쒸워주려고 했다. 그러나 머리가 너무 썰렁해서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나는 민둥머리지만 이 젊은이는 머리숱이 많으니까."

그는 모자를 다시 썼다.

'그보다는 장화를 신겨주는 것이 좋겠어."

세몬은 청년을 다시 앉히고 털장화를 신겨주었다.

"이만하면 됐겠지. 자아, 이젠 좀 움직여 보라구. 몸이 녹게 말이야. 여기서 우물쭈물할 것 없잖아? 그런데 자네, 걸을 수는 있겠나?"

청년은 부드러운 눈길로 세몬을 바라볼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왜 말을 하지 않는 거야? 여기서 겨울을 날 작정인가? 어디든 사람 사는 데로 가야지. 여기 내 지팡이가 있으니까 걷기 힘들면 이거라도 짚으라구. , 가세! 가자니까!"

청년은 걷기 시작했다. 뒤쳐지는 일도 없이 썩 잘 걸었다. 걸으면서 세몬이 물었다.

"그런데 자네 대체 어디서 왔나?"

"저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닙니다."

"이 고장 사람이라면 내가 모를 리 없지. 내가 묻고 있는 건 어째서 이런 데 와 있느냐는거야. 저 교회 구석 같은 데 말일세."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들어보나마나 어떤 나쁜 놈들한테 몹쓸짓을 당했겠지."

"아무도 제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야 만사가 하나님의 뜻이니까. 아무튼 어디 들어가서 좀 쉬어야 할 텐데. 대체 어디로

갈 작정인가?"

"어디든 좋습니다."

세몬은 저으기 놀랐다. 청년은 불량해 보이지도 않았고 말씨도 공손했지만 자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려 들지 않았다. 세몬은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말못할 사정은 있는 법이니까.'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떤가, 나하고 같이 우리 집으로 가는게? 몸이 녹으면 정신이 좀 나겠지."

세몬은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낯선 젊은이도 뒤떨어지지 않고 곧잘 따라왔다. 차가운 바람이 세몬의 루바시카자락을 파고들었다. 술이 깨면서 오싹오싹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연신 코를 훌쩍거렸다. 마누라에게서 빌려 입은 무명 속옷 앞자락을 바싹 당겨 여미면서 그는 생각했다.

'털가죽 외투가 대체 어떻게 돼 버린 거야? 모피 외투를 장만하러 나섰다가 입고 있던 것마저 벗어던진 꼴이 됐으니. 거기다 벌거숭이 사내까지 달고 들어가면 마트료나가 펄펄 뛸게 뻔한데.'

아내 생각을 하자 세몬의 마음은 우울해졌다. 그러나 옆에서 걷고 있는 젊은이를 돌아보자 교회 모퉁이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 자신을 쳐다보던 그의 눈빛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다시 환하게 밝아왔다.

3.

세몬의 아내는 일찌감치 집안일을 끝냈다. 장작을 쪼개고 물을 길어와서 아이들과 같이 저녁을 먹은 다음 그녀는 생각에 잡겼다.

'오늘 저녁에 빵을 구울까, 내일로 미룰까.'

제법 큼직한 빵 한 조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세몬이 밖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온다면 밤참은 그리 많이 먹지 않을거야. 그럼 내일 아침까진 이걸로 충분할 것 같은데.'

그녀는 빵조각을 만지작거리면서 궁리했다.

'아무래도 빵 굽는 건 내일로 미뤄야겠어. 밀가루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있는 것만으로 금요일까지 버텨야지.'

마트료나는 빵 굽는 일을 그만두기로 하고 남편의 옷을 깁기 시작했다. 바느질을 하면서 그녀는 남편이 어떤 가죽을 사올까 생각했다.

'설마 가죽 장수에게 속지는 않았겠지. 그이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라니까. 자기는 꿈에도 남을 속일 줄 모르면서 동네 코흘리개한테도 맥없이 속아넘어가거든. 8루블이라면 적은 액수가 아닌데. 그 정도면 좋은 모피 외투를 장막 할 수 있고말고. 무두질한 최고급 가죽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모피 외투인 건 분명해. 모피 외투 하나 없이 겨울을 나려니 작년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냇가엘 나갈 수 가 있었나, 들엘 나갈 수가 있나. 오늘만 해도 그래. 옷이란 옷은 모조리 껴입고 나가 버리니 나는 걸칠 것이 없다구. 그런데 이이가 너무 늦는 거 아냐? 돌아올 때가 지났는데. 혹시 어디서 술타령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닐까?'

마트료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현관 계단이 삐그덕거리면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바늘을 일감에 꽂아놓고 마트료나가 밖으로 나가 보니 사내 둘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세몬 옆에 서 있는 낯선 청년은 맨머리에 털장화를 신고 잇었다. 그녀는 당장에 남편이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다시 보니 남편은 외투도 입지 않은 속옷 바람에 빈손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트료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그 돈으로 몽땅 마셔 버린 게 틀림없어. 생판 모르는 건달하고 어울려 진탕 퍼마시고는 그것도 모자라 집에까지 끌고 왔군.'

두 사람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서던 마트료나는 낯선 사내가 입고 있는 외투가 자기네 것임을 알아보았다. 젊은이는 외투 밑에 내의를 입은 것 같지도 않았고 모자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는 방 안에 들어와서도 잠자코 한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도 않고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뭔가 나쁜 짓을 저질러 놓고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게 틀림없어.'

마트료나는 이마를 찌푸린 채 벽난로 쪽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두 사람이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세몬은 모자를 벗고 태연하게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봐, 왜 그러고 있어? 식사 준비를 해야지."

마트료나는 입 속으로 뭔가 투덜거릴 뿐 벽난로 옆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사

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연신 고개를 젓고 있었다. 세몬은 그녀가 몹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는 낯선 사내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 앉으라구. 저녁을 먹어야지."

낯선 사내가 의자에 앉았다.

"왜 그래? 저녁 준비를 하지 않은 거야?"

마트료나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왜 안 해요. 하긴 했지만 당신 몫은 없어요. 보아 하니 당신은 염치마저 홀랑 마셔버린 모양이군요. 모피 사러 간다더니 모피는커녕 입고 나간 외투마저 남 벗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저 건달을 집에까지 꿰어차고 들어오다니. 당신네 주정뱅이들한테 줄 저녁은 없단 말이에요."

"마트료나,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떠들어 댈 거야? 어떻게 된 일인지 들어보고 나서 지껄여야지."

세몬은 속주머니를 더듬어 지폐를 꺼냈다.

", 돈은 여기 있다구. 도리포노프가 꾸어간 건 못 받았지만 내일은 꼭 주겠다고 약속했어."

그래도 마트료나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양가죽도 못 산 터에 단벌 외투는 낯선 벌거숭이 사내한테 벗어줘 버리고, 거기다 그 사내를 집에까지 끌고 오다니. 탁자 위의 돈을 집어 간수하면서 마트료나는 말했다.

"아무튼 저녁은 없어요. 저런 벌거숭이 주정뱅이들을 일일이 아랑곳하다간……."

"이봐, 마트료나. 말 좀 삼가라니까. 우선 내 말을 들어보라구."

"당신 같은 주정꾼의 말은 듣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정말이지 난 당신 같은 주정뱅이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구요. 어머니가 주신 옷감들도 모조리 술값으로 날려 버리더니 이번엔 또 양가죽 살 돈마저 목구멍에 홀랑 들이붓고 들어왔군요."

세몬은 자기가 마신 것은 고작 20카페아카 뿐이라는 것과, 청년을 데려오게 된 사정을 아내가 알아듣도록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마트료나는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어디서 그렇게 좔좔 쏟아져 나오는지 한꺼번에 두 마디 세 마디씩 지껄여 대니 세몬은 끼여들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10년도 더 된 옛날 일까지 들추어가며 사정없이 퍼부어 대다가 갑자기 세몬에게 달려들어 옷소매를 움켜잡았다.

"여러 말 말고 내 옷이나 내놔요! 하나밖에 없는 옷을 빼앗아 입고 뻔뻔하기도 하지! 썩 벗어 달라니까요! 이런 못난이, 팔푼이 같으니라고! 차라리 어디 가서 콱 죽어 버리는 게 낫지."

세몬이 옷을 벗으려는데 마트료나가 달려들어 잡아당기는 바람에 솔기가 부드득 뜯어졌다.

마트료나는 옷을 나꿔 채 입고 문께로 달려갔다. 그대로 나가 버리려고 하다가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속은 상하지만 그래도 이 사내가 누군지는 밝혀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

마트료나는 멈춰 서서 입을 열었다.

"온전한 사람이라면 저렇게 맨발로 돌아다닐 리가 없지. 게다가 저 사람은 내의조차 입지 않았다구요. 당신이 나쁜짓을 하지 않았다면 어디서 저 사람을 끌고 왔는지 왜 말을 못하는 거죠?"

"아까부터 그 말을 하려던 참이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사람이 교회 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걸 우연히 보게 되었단 말이오. 꽁꽁 얼어붙은 알몸으로 말이야. 글세, 여름도 다 갔는데 벌거숭이라니! 마침 하늘이 도와서 내가 그리로 지나가게 됐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얼어죽을 뻔했다니깐. 살아가노라면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누가 알겠소! 그래 내가 외투를 입혀서 데리고 왔지. 마트료나 당신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사람 처지를 생각해 보구려. 사람은 누구든 한 번은 죽는 거니까."

마트료나는 뭔가 좀더 심한 말을 퍼부어 주고 싶었으나 낯선 젊은이를 쳐다보자 왠지 말문이 막혔다. 청년은 걸상 끄트머리에 죽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슴팍에 고개를 떨군 채, 눈을 드는 일도 없이 마치 무엇에 목을 졸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마트료나가 잠자코 있자 세몬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트료나, 당신에겐 하나님도 없소?"

마트료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낯선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부글거리던 노여움이 홀연히 가라앉았다. 그녀는 돌아서서 방구석에 있는 난로 곁으로 걸어가 저녁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잔을 탁자 위에 놓고 크바스(*귀리와 엿기름으로 만든 러시아 맥주)를 따르고

남은 빵을 내놓았다. 나이프와 스푼을 놓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와서 식사들 하세요."

세몬은 낯선 청년을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앉으라구, 젊은이."

세몬이 빵조각을 잘게 썰었다. 두 사람은 먹기 시작했다. 마트료나는 식탁 끝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낯선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문득 젊은이가 가여워져서 돌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청년이 갑자기 밝은 표정을 짓더니 찌푸렸던 이마를 펴고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식사가 끝나자 마트료나는 그릇들을 치우고 낯선 청년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죠?"

"저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곳에 있었나요?"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 옷은 누가 벗겨간 거죠?"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 겁니다."

"그래서 벌거벗고 쓰러져 있었단 말이에요?"

", 벌거벗은 채 쓰러져 거의 얼어죽을 뻔했죠. 그런데 댁의 주인께서 저를 발견하고 가엾게 여겨 외투를 벗어서 입혀주고는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겁니다. 여기 오자 이번엔 아주머니께서 절 불쌍하게 생각하시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죠. 두 분께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릴 겁니다."

마트료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기워놓은 세몬의 낡은 내의를 창가에서 집어다 젊은이에게 건네주었다.

", 이거라도 입어요. 그리고 어디든 마음에 드는 자리에 누워서 자요. 침대 위든 벽난로 옆이든."

낯선 젊은이는 외투를 벗고 내의를 입은 다음 침대에 드러누웠다. 마트료나는 불을 끄고 외투를 집어 남편 있는 데로 갔다. 외투 자락을 덮고 누었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낯선 젊은이의 일이 도무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던 것이다. 젊은이가 마지막 남은 빵을 먹어 버리는 바람에 당장 내일 아침 먹을 것이 없다는 것과, 남편의 내의를 주어 버린 일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젊은이가 싱긋 웃던 걸 생각하면 그녀의 마음은 어느새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었다.

마트료나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세몬도 잠이 오지 않는지 외투 자락을 한 번씩 끌어당기곤 했다.

"남은 빵을 다 먹어 버렸는데, 반죽을 해두지도 않았으니 내일은 어쩌죠? 옆집 말라냐네더러 좀 꾸어 달랄까?"

"그러든지.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려고."

"마트료나는 한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 말이에요,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어째서 자기 얘기는 통 하려 들지 않는 걸까요?"

"뭔가 말못할 사정이 있겠지."

"세몬!"

"?"

"우리는 남을 도와주는데, 남들은 왜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거죠?"

세몬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거 쓸데없는 소리 작작 하라니까."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획 돌아누워 잠들어 버렸다.

5.

이튿날 세몬은 아침 일찍 잠이 깼다.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마트료나는 이웃집으로 빵을 꾸러 갔다. 어제 데리고 온 낯선 청년은 낡은 내의를 입은 채 걸상에 앉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제보다 한결 밝아 보였다.

"어떤가, 젊은이! 배는 빵을 원하고 벗은 몸뚱이는 옷을 원하니 뭔가 벌이를 해야 하지 않겠나? 자네는 무슨 일을 할 줄 아나?"

세몬은 깜짝 놀아서 말했다.

"뭐든 해보려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거야. 배워서 못할 일은 없으니까."

"다들 일을 하니 저도 뭐든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자네 이름이 뭔가?"

"미하일입니다."

"그래, 미하일. 자네는 신상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인데,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꼭 알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아무튼 밥벌이는 해야 해. 내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해주면 밥은 먹여주겠네."

"고맙습니다. 뭐든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가르쳐만 주십시오."

세몬은 실을 집어 손가락에 감아서 꼬기 시작했다.

"어려울 건 없어. , 보라구."

미하일은 잠시 들여다보더니 금방 배워서 따라 했다. 세몬은 다시 꼰 실을 찌는 법을 가르쳤다. 미하일은 이번에도 금방 배웠다. 주인이 실을 꿰어 가죽 깁는 시범을 해 보이자 미하일은 이것도 이내 익혔다. 세몬이 무엇을 가르쳐도 미하일은 금방 터득하여 사흘이 지나자 거의 모든 작업 과정을 능숙하게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이제까지 줄곧 구두를 꿰매어 온 사람 같았다.

그는 부지런히 일하고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그리고 한가할 때면 조용히 천장만 쳐다보았다.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농담을 하거나 웃는 법도 없었다. 미하일이 웃어보인건 처음 왔던 날 마트료나가 저녁을 준비했을 때뿐이었다.

6.

하루가 지나고 1주일이 지나고 1년이 지났다. 미하일은 여전히 세몬의 집에 살면서 가게 일을 거들어 주고 있었다. 미하일의 솜씨에 대해서는 소문이 자자했다. 세몬의 직공 미하일만큼 튼튼하고 모양 좋은 구두를 짓는 사람은 없다고 하여 이웃 마을에서까지 주문이 밀려드는 바람에 세몬의 수입은 날로 늘어갔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세몬이 미하일과 마주앉아 일을 하고 있는데 삼두마차 한 대가 방울소리도 요란하게 집 앞에 멈췄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마차는 가게 바로 앞에 멈춰 서 있었는데, 젊은 사람 하나가 마부석에서 뛰어내려 마차 문을 열었다. 마차 안에서 모피 외투를 입은 신사가 나왔다. 마차에서 내린 신사는 세몬의 가게를 향해 층계를 올라왔다. 마트료나가 뛰어나가 문을 활짝 열었다. 신사는 몸을 구부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쭉 폈다. 그는 머리가 천장에 닿을 만큼 키가 컸고 몸집은 방 안을 꽉 채울 정도였다.

세몬이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그는 신사의 거대한 몸집에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세몬도 호리호리한 체격이었고 미하일도 여윈 편이었으며 마트료나로 말할 것 같으면 더욱이나 삐쩍 마른 나뭇가지나 다름없는 몸매였는데, 이 신사는 어디 딴세상에서라도 왔는지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윤이 나고 목덜미는 황소처럼 굵직한 것이 마치 온 몸이 무쇠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신사는 숨을 한 번 크게 내쉬더니 외투를 벗고 의자에 앉으면서 물었다.

"주인이 누군가?"

세몬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제가 주인인뎁쇼, 나리."

손님은 하인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페치카, 물건을 가져오너라!"

하인이 달려가 꾸러미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손님은 꾸러미를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풀어."

하인이 꾸러미를 풀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가죽이었는데, 손님이 그것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세몬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가죽인지 알겠나?"

"알고말굽쇼, 나리."

"이봐, 정말 이 가죽이 무슨 가죽인지 안단 말인가?"

세몬이 가죽을 만져보고 나서 대답했다.

", 아주 좋은 가죽입니다요."

"그야 물론 좋은 가죽이지. 얼간이 같으니라고. 자넨 이런 가죽을 구경조차 못해 봤을걸.

이건 토이칠란트산이야. 20루블이나 주고 산 거라구."

세몬은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저 같은 놈이 감히 만져볼 수도 없는 물건이구만요."

"그렇다마다. 그런데 이걸로 내 발에 꼭 맞는 장화를 지을 수 있겠나?"

"지을 수 있고말굽쇼, 나리."

신사는 느닷없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지을 수 있다고? 도대체 누구의 장화를 짓는지, 어떤 가죽으로 짓는지 똑똑히 기억해 두란 말이야! 나는 1년을 신어도 모양이 망가지지 않고 꿰맨 자리가 뜯어지지도 않는 장화를 원해!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으면 맡아서 재단을 하라구. 아니라면 아예 손대지 않는게 좋아. 미리 말해 두지만, 만약 장화가 1년 안에 망가지거나 찢어지기라도 하면 네놈을 감옥에 처넣어 버릴 테니까. 대신 1년이 지난 뒤에도 멀쩡하면 그때 가서 품삯으로 10루블을 주지."

세몬은 겁이 더럭 나서 미처 대꾸할 말을 찾기 못하고 미하일 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팔꿈치로 미하일을 쿡쿡 찌르면서 세몬이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이봐 어떻게 하지?"

미하일은 일을 맡으라는 듯 고개를 약간 끄덕여 보였다. 세몬은 미하일을 믿고 1년이 지나도 망가지거나 찢어지지 않는 장화를 만드는 일을 맡기로 했다. 신사는 하인을 불러 왼쪽 발의 구두를 벗기게 하고는 다리를 쭉 폈다.

"치수를 재라구!"

세몬은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종이를 이어 붙였다. 그런 다음 자리를 깔고 무릎을 꿇고 손님의 양말을 더럽히지 않도록 앞치마에 손을 닦은 뒤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먼저 발바닥을 재고 다음으로 발등을 재고 나서 종아리를 잴 차례가 되었는데 양쪽 종이 끝이 닿지를 않았다. 손님의 종아리가 통나무만큼이나 굵었던 것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라구. 종아리가 꼭 끼어서는 안되니까."

세몬은 다시 종이를 이어 붙였다. 신사는 의젓하게 앉아 양말 속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방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미하일을 보더니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저희 가게의 직공인데 솜씨가 그만입지요. 그가 나리의 장화를 짓게 될것입니다요."

"똑똑히 기억해 두라구. 1년을 신어도 끄떡없는 신발을 만들어야 해."

신사가 미하일에게 말했다. 세몬도 미하일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미하일은 손님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그 뒤의 구석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 누군가가 있어 그가 누군지 알아내려고 유심히 살피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한동안 물끄러미 방구석을 바라보고 있던 미하일은 갑자기 싱긋 웃더니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뭘 보고 싱글거리는 거야? 멍청한 놈 같으니! 정신차려서 기한내에 장화를 만들어낼 궁리나 할 일이지."

", 기한내에 틀림없이 만들어 놓겠습니다."

미하일이 말했다.

"명심하라구."

신사는 구두를 신고 외투를 입은 다음 문간으로 향했다.

그런데 허리를 구부려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린 탓에 문틀에다 이마를 세게 들이받았다. 신사는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는 이마를 문지르며 마차를 타고 가버렸다.

신사가 떠나는 걸 보고 세몬이 말했다.

"정말 굉장한 손님이야. 저런 사람은 여간해서 죽일 수도 없을걸. 문틀이 부서지도록 이마를 부딪쳤는데도 그다지 아파하는 것 같지 않더군."

그러자 마트료나가 말했다.

"저렇게 호사하게 사는데 체격이 안 좋을 수가 있겠수? 저런 사람한테는 저승사자도 감히 범접을 못할 거예요."

7.

세몬이 미하일에게 말했다.

"일을 맡기 했지만 까딱 잘못하다간 꼼짝없이 감옥행이야. 최고급 가죽인데다 손님 성깔도 여간 아니니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없어야 할 텐데. 자네가 눈도 밝고 나보다 솜씨도 나으니 여기 이 치수대로 재단을 해 보게. 나는 겉가죽을 꿰맬 테니까."

미하일은 시키는 대로 신사가 가져온 가죽을 탁자 위에 펼쳐놓고 가위로 자르기 시작했다. 옆에 서서 미하일이 마름질하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던 마트료나는 깜짝 놀랐다. 구두 짓는 일이라면 그녀도 이젠 제법 안다고 자부하는 터인데, 가만 보니 미하일은 손님이 주문한 장화 모양과는 전혀 딴판으로 가죽을 둥글게 자르고 있었던 것이다. 주의를 줄까 하다가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손님이 주문한 내용을 내가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지. 나보다야 아무래도 미하일이 더 잘 알고 있을테니까 공연히 참견하지 않는데 좋을 거야.'

미하일은 마름질을 마치고 가죽을 꿰매기 시작했다. 그런데 장화를 꿰밀 때 쓰는 두겹실이 아니라 슬리퍼를 짓는 한겹실을 사용하는 것이다. 마트료나는 이번에도 깜짝 놀랐으나 역시 참견하지 않았다. 미하일은 부지런히 일손을 놀리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어 세몬이 일어나서 보니 미하일은 신사의 가죽으로 슬리퍼를 만들고 있었다. 세몬은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이게 웬일인가. 우리 집에서 일한 지 1년이 넘도록 미하일이 실수하는 걸 본적이 없는데 하필이면 지금 같은 때 이런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다니. 손님은 굽 있는 장화를 주문했는데 밋밋한 슬리퍼 따위를 만들었으니 가죽을 통 못 쓰게 돼 버렸잖아. 손님한테 뭐라고 변명한단 말인가? 이런 가죽을 쉽게 구할 수도 없을텐데.'

그는 미하일에게 말했다.

"여보게, 이게 무슨 짓인가? 자네 나를 죽이려고 작정했구만. 손님은 분명 장화를 주문했는데 자낸 도대체 뭘 만들어 놓은 건가?"

세몬이 미하일을 나무라기 시작한 순간, 현관 문고리가 덜거덕거리더니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누가 말을 타고 와서 이제 막 고삐를 비끄러매고 있는 중이었다.

나가 보니 그는 좀전에 왔던 신사의 하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와요. 그런데 무슨 일로?"

"주문했던 장화에 관한 일로 마님의 심부름을 왔습니다."

"장화에 관한 일이라고?"

"장환지 구둔지 이제 필요 없게 됐습니다. 나리께서 돌아가셨거든요."

"아니, 뭐라고 했소?"

"여기서 댁으로 돌아가시던 길에 마차 안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댁에 도착해서 내려 드리려고 보니까 나리께서 짐짝처럼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벌써 몸이 굳어버린 뒤라 가까스로 마차에서 끌어내렸지요. 그래서 마님께서 제게 분부 하셨습니다. '구둣방에 가서 말하거라. 아까 나리께서 주문하신 장화는 필요 없게 되었으니 대신 그 가죽으로 죽은 사람에게 신기는 슬리퍼를 지어달라고 말이야. 그리고 완성되길 기다려서 슬리퍼를 가지고 오너라.'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미하일은 마름질하고 남은 가죽 조각을 뭉쳐 탁자 한 켠으로 치우고 나서 완성된 슬리퍼를 툭툭 털어 앞치마에 닦은 다음 하인에게 내밀었다.

"안녕히 계십시요, 여러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인은 슬리퍼를 받아들고 돌아갔다.

8.

다시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 미하일이 세몬의 집에 온지도 어느덧 6년이 되었다. 처음이나 마찬가지로 그는 어딜나다니지도 않고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법도 없었다. 그동안 그가 웃은 것은 단 두 번뿐이었다. 마트료나가 저녁을 차려주었을 때와 장화를 맞추러 온 신사를 보았을 때였다.

세몬은 이 제자가 기특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이제 더이상 미하일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미하일이 일을 그만두고 나가 버리지나 않을까 은근히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어느 날 온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였다. 마트료나는 화덕에 냄비를 올리고, 아이들은 의자 사이를 뛰어다니거나 창 밖을 내다보며 놀고 있었다. 세몬은 창가에 앉아 가죽을 꿰매고 미하일은 다른 창가에서 구두 뒤축을 다는 중이었다.

그때 사내아이가 의자를 넘어 미하일에게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흔들며 창밖을 가리켰다.

"미하일 아저씨, 저길 좀 봐요. 어떤 아줌마가 계집애 둘을 데리고 우리집으로 오고 있어요. 계집아이 하나는 절름발인데요?"

그 말을 듣자마자 미하일은 갑자기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세몬은 놀랐다. 이제껏 바깥을 내다보는 일이라곤 없던 사람이 오늘따라 창문에 얼굴을 들이대다시피 하고 뭔가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몬도 밖을 내다보았다.

깨끗하게 차려입은 부인이 가게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부인은 털외투를 입고 두툼한 목도리를 두른 두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이들은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다만 한 아이가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다.

부인은 현관 계단을 올라와 문을 열더니 먼저 두 여자아이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자기도 따라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십시오. 무슨 볼일이신지?"

부인은 탁자 옆에 앉았다. 여자아이들은 낯이 선 듯 그녀의 무릎에 매달렸다.

"아이들에게 봄에 신을 구두를 맞춰 주려고요."

"그러세요? 저희들은 그렇게 작은 구두는 지어본 적이 없지만, , 할 수 있을 겁니다. 가장자리에 장식을 단 것이 좋을까요, 안에 천을 받친 것이 좋을까요? 여기, 미하일은 솜씨가 정말 훌륭하답니다."

세몬이 미하일을 돌아보니, 그는 우두커니 앉아 두 여자아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다시 세몬을 놀라게 했다. 하긴 두 아이 모두 드물게 예쁘기는 했다. 눈동자는 새까맣고 두 볼은 포동포동하고 발그스름했으며, 모피 외투에 비싼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미하일이 무슨 연유로 저렇듯 열심히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세몬은 이해할 수 없었다. 미하일은 마치 그 아이들을 이전부터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세몬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부인에게로 돌아앉아 흥정을 계속했다. 곧 값을 정하고 치수를 잴 차례가 되었다. 부인은 다리를 저는 아이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혔다.

"수고스럽겠지만 이 아이의 치수는 두 가지로 재 주셔야 겠어요. 불편한 발 쪽은 한 짝이면 되고 성한 발에 맞춰선 세 짝을 지어 주세요. 두 아이가 치수가 같거든요. 이 아이들은 쌍둥이랍니다.."

세몬은 치수를 재고 나서 다리가 불편한 아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습니까? 정말 귀여운 아인데……. 날때부터 그랬었나요?"

"아니예요. 아이들 엄마가 잘못해서 그만……."

이때 마트료나가 끼여들었다. 부인과 아이들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 궁금해서 견elf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부인은 이 아이들의 친어머니가 아니신가요?"

"어머니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랍니다. 남남간이지만 그냥 맡아서 기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도 이처럼 귀여워하시는군요."

"직접 낳은 아이가 아니더라도 키우다 보면 정이 들게 마련이니까요. 두 아이 다 제 젖을 먹여 길렀답니다. 제 아이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지요. 죽은 아이는 그렇게 불쌍한 줄 몰랐는데 이 아이들은 정말 가엾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럼 이 아이들은 어느 댁 따님들인가요?"

9.

부인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벌써 6년 전의 일이랍니다. 이 두 아이는 태어난 지 1주일도 못 되어 고아가 되어 버렸지

. 아버지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사흘 전에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아이들을 낳고 곧 숨을 거뒀답니다. 저는 남편과 함께 이웃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이 아이들의 부모와는 한 식구처럼 지내는 사이였지요.

아이들 아버지는 숲에 들어가 혼자서 일을 하다가 어느 날 큰 나무가 넘어지면서 허리를 덮치는 바람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어요. 가까스로 집에까지 옮겨다 놓았지만 곧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지요. 그리고 며칠 안 있어 그의 아내가 쌍둥이를 낳은 거예요. 바로 이 아이들이죠. 집이 몹시 가난한 데다 돌봐줄 친척 하나 없어, 애들 엄마는 혼자 아기를 낳고 혼자 죽어갔답니다. 해산 다음날 아침에 제가 문안을 갔더니, 가엾게도 애들 엄마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숨을 거두는 순간 바로 이 아이위로 쓰러지는 바람에 이 아이는 다리 한쪽을 못쓰게 되고 말았죠.

마을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씻기고 수의를 입히고 관을 만들어 장례를 치렀습니다. 다들 친절한 사람들이거든요. 하지만 뒤에 남은 갓난아기들 일이 걱정이었지요. 모인 여자들 중에 젖먹이가 딸린 이는 저뿐이었습니다. 제겐 태어난 지 8주밖에 안된 첫아들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잠시 두 아이를 맡기로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의논을 했죠. 하지만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겠어요? 하루는 마을 사람들이 제게 말했습니다. '마리아, 아이들을 좀더 데리고 있어 줘요. 우리가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볼 테니까 그때까지만.'

저는 다리가 온전한 아이에게만 젖을 물렸습니다. 또 한 아이에겐 아예 먹일 생각도 하지 않았죠. 어차피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아이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뒤론 모두에게 똑같이 젖을 먹였습니다. 제 아이와 이 아이들 둘 해서 한꺼번에 세 아이를 키우게 된 거죠. 그때야 젊고 기운도 펄펄하고 먹성도 좋았으니까 그럴 수 있었을 거예요.

두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동안 한 아이는 차례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한 아이가 젖꼭지를 놓아야 다음 아이가 먹을 수 있었죠.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이 두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낳은 아이는 두 살 되던 해에 그분께서 데려가고 말았지요.

그 후 살림살이는 점점 나아졌습니다. 지금은 이 거리 상인들 소유의 물방앗간 일을 맡아보고 있는데 수입이 좋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걱정이 없답니다. 다만 아이가 없을 뿐이죠.

정말 이 아이들이 없었다면 혼자 쓸쓸해서 어떻게 살았을까요! 제가 이 아이들를 귀여워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죠. 이 아이들은 제게 촛불과도 같은 존재인 걸요."

부인은 한 손으로 다리를 저는 아이를 당겨 안으면서 다른 한 손으론 빰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마트료나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부모도 없이는 살 수 있어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더니 과연 그 말이 옳은 것 같군요."

세 사람이 이런 말들을 주거니받거니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미하일이 앉아 있는 구석에서 섬광이 비치더니 방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미하일은 두 손을 무릎에 얹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10.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가자 미하일은 걸상에서 일어나 일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앞치마를 벗더니 주인 내외에게 공손히 절을 하면서 말했다.

"이제 작별을 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해 주셨으니 두 분께서도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주인 내외는 그에게서 눈부신 후광이 비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세몬도 일어나 마주 절하면서 말했다.

"미하일, 역시 자네는 보통 인간이 아니었군. 더 이상 자네를 붙잡을 수도, 이것저것 캐물을 수도 없을 것 같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알려 줄 수 없겠나? 내가 처음 자네를 만나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 자네는 몹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네. 그러다가 집사람이 저녁을 대접하자 자네는 싱긋 웃으며 갑자기 표정이 밝아졌는데, 그건 어찌된 영문인가? 그 뒤 어느 신사분이 장화를 맞추러 온 적이 있었지. 그때도 자넨 싱긋 웃으며 밝은 표정을 지었어. 아까 그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왔을 때 자네는 세 번째로 웃었네. 그리고 자네 몸에서 후광이 비쳤지. 미하일, 왜 자네 몸에서 빛이 나는지, 그리고 어째서 세 번을 웃었는지

그 까닭을 말해 주지 않겠나?"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제 몸에서 빛이 나는 건 다름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었는데 이제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제가 세 번 웃은 것은 하나님께서 제게 내리신 세 가지 말씀의 뜻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말씀의 뜻은 아주머니께서 저를 가엾게 여겨주셨을 때 깨달았지요. 그래서 웃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의 뜻은 부자 나리가 장화를 주문했을 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웃었지요. 그리고 오늘 두 여자아이를 보았을 때 세 번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어 또다시 웃은 것입니다."

세몬이 다시 물었다.

"하나님께선 무슨 이유로 자네에게 벌을 내리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세 가지 말씀이란 뭔가?"

미하일이 대답했다.

"제가 벌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래 천사였는데, 하루는 하나님께서 제게 한 여인의 영혼을 거두어 오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제가 지상에 내려와서 보니 그 여인은 몹시 쇠약한 몸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여인은 방금 쌍둥이 아이를 낳았던 것입니다. 갓난아기들은 어머니 곁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어머니는 아기들에게 젖을 먹일 기운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여인은 나를 보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줄 짐작하고 흐느껴 울면서 말했습니다.

', 천사님! 제 남편은 숲에서 일하다 나무에 깔려 죽었습니다. 바로 엊그제 장례를 치렀지요. 제겐 형제자매도, 아주머니도 할머니도 없습니다. 이 갓난애들을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발 제 영혼을 거둬가지 마시고 이 아이들을 제 손으로 키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 핏덩이들이 부모 없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여인이 애원하는 말을 듣고 아기 하나를 안아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려주고 다른 아기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준 다음 하늘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여인의 영혼은 거두어 오지 못했습니다. 여인의 남편은 나무에 깔려 죽고, 여인은 방금 쌍둥이를 낳은 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저를 보고 울면서 애원했습니다. 제발 영혼을 거두어 가지 말아 달라고 말입니다. 제발 자기 손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있게 해 달라면서, 부모가 없으면 그 갓난아이들은 살 수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차마 그 여인의 영혼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시 분부하셨습니다.

'내려가 산모의 영혼을 거두어라. 그러면 세 가지 말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의 내부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세 가지를 알게 되는 날 너는 하늘나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산모의 영혼을 거두었습니다. 아기들은 어머니 품에서 떨어졌으나, 죽은 여인의 몸이 침대 위로 쓰러지면서 한 아이를 덮쳐 그만 한 쪽 다리를 못 쓰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저는 여인의 영혼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쳐 제 두 날개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영혼만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저는 지상으로 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11.

세몬과 마트료나는 자기들이 먹이고 입혔던 사람이 누구인지, 자기들과 같이 살고 함께 일해 온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두려움과 기쁨으로 눈물을 흘렸다.

천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벌거벗은 채 홀로 들판에 버려졌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인간 생활의 괴로움도 모르고 추위나 굶주림도 알지 못했습니다. 배가 몹시 고프고 몸은 얼어오는데 전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문득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가 들판 가운데 서 있는 게 보였습니다. 저기 몸을 의지하면 되겠다 싶어 저는 그곳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교회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람이나 피하려고 교회 뒤쪽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지요.

날이 저물자 허기는 더욱 심해지고 몸은 꽁꽁 얼어붙어 금방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문득 어떤 사람이 장화를 들고 길을 걸어오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인간이 되어 처음으로 언젠가는 죽어야 할 인간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 얼굴을 쳐다보기가 두려워 저는 고개를 돌려 버렸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 사나이는 어떻게 이 추운 겨울을 날 것인가, 어떻게 처자식을 먹여 살릴 것인가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마침 저기 사람이 오고 있지만, 그는 자기 아내의 모피 외투를 마련할 일이며 식구들을 먹여살릴 일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으니 나를 도와주긴 틀렸다.'

그 사람은 저를 보더니 이마를 찡그리며 아까보다 더욱 무서운 얼굴이 되어 그대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실낱 같은 한 줄기 희망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나이가 되돌아오는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저는 조금 전에 지나간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아까는 그 얼굴에 죽음의 기운이 서려 있었는데, 다시 돌아왔을 때 보니 만면에 생기가 돌고 하나님의 그림자가 그 속에 얼비쳐 있었거든요.

사나이는 제게로 다가오더니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입혀주고 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집에 당도하자 한 여인이 뛰어나와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인은 사나이보다 훨씬 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죽음의 독기 때문에 저는 숨을 쉴 수도 없었습니다. 여인은 저를 밖으로 내몰려고 했습니다.

만약 그대로 저를 내쫓았다면 여인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여인의 남편이 문득 하나님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여인의 기세가 누그러지면서 태도가 부드러워졌습니다. 여인의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는 이미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여인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습니다. 저는 거기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

. 그 순간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말씀하셨었지요. '인간의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저는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 사랑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약속하신 일을 이렇게 보여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저는 더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그래서 싱긋 웃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부를 알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저는 아직 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두 분과 함께 지내기 시작해서 1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한 사나이가 찾아와서 1년을 신어도 망가지거나 찢어지지 않을 장화를 주문했습니다. 그 사나이를 쳐다보는 순간 저는 그의 등뒤에 제 동료인 죽음의 천사가 서 있는 걸 알아보았습니다. 저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저는 그 천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나이의 영혼이 해가 지기 전에 그의 몸을 떠나게 되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사나이는 1년을 신어도 망가지지 않을 신발을 원하지만 자신이 오늘 중으로 죽을 거라는 사실은 모르는구나.'

저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을 생각해냈습니다. 인간의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지혜였습니다. 옛 동료였던 천사를 만난 일도 기뻤지만, 무엇보다도 두 번째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된 것이 기뻐서 저는 다시 싱긋 웃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전부를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저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 이 댁에 머무르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말씀의 뜻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6년째 되는 오늘, 한 부인이 쌍둥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가게를 찾아왔습니다. 그 아이들을 보았을 때, 저는 때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어버린 그 아이들이 무사히 잘 자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그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을 때, 나는 그 여인의 말대로 아이들은 부모 없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이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여인이 그 애들을 맡아 잘 키우고 있지 않은가.'

그 부인이 남의 아이들로 인해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 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해답도 깨달았지요. 하나님께서 마지막 깨달음을 주심으로써 마침내 저를 용서해 주시 것을 알고 너무 기쁜 나머지 세 번째로 웃었던 것입니다."

12.

이윽고 천사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전신이 눈부신 빛으로 에워싸여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천사가 커다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에서 소리가 울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이와 같은 일을 깨달았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걱정하는 마음으로써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어머니에게는 자신의 아이들이 살아가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부자 또한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 어떤 인간에게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살아서 신을 장화인지, 죽은 뒤 신을 슬리퍼인지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인간이었을 때 무사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이 내 일을 여러 가지로 걱정하고 염려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가던 행인과 그 아내에게 사랑이 있어 나를 가엾게 여기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다. 두 고아들이 잘 자라 온 것도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염려해 준 덕분이 아니라 한 여인에게 사랑의 마음이 있어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각자 자신의 일을 염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들이 잘 살아기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제 다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 각자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보여주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분은 인간들이 하나가 되어 살아가기를 원하시며, 그래서 자신과 모든 인간을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계시하긴 것이다. 이제야말로 나는 깨달았다. 작자 자신을 걱정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들의 착각일 뿐, 진실로 인간은 오직 사랑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다. 마음에 사랑이 가득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말을 마치자 천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웅장한 목소리가 울려퍼져 온 집안이 울리는 듯 했다. 그때 천장이 갈라지고 땅에서 하늘까지 불기둥이 치솟았다.

세몬과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땅바닥에 엎드렸다. 미하일의 등에 날개가 돋아나 활짝 펼쳐졌다. 천사는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이윽고 세몬이 정신을 차렸을때는 집은 옛날 모습 그대로였고, 방 안에는 그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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