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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터키 여행를 계획하는 분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일정에 따라 정리하였습니다.

[출처] 남상학의 시솔길

<터키 여행기>(1)

역사와 문화의 보고(寶庫)

서양과 동양의 길목을 찾아서






호기심 속에 찾아간 터키

마치 친선 경기처럼 월드컵 4강 전을 치룬 파트너의 나라, 한국전에 참전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한국을 '피로 맺어진 형제'(칸카르데쉬)라고 부르는 나라, 조상의 기원을 동양에 두고 기마 유목민족으로 서양에 진출한 강인한 민족성을 가진 나라, 우리와 같은 알타이족에 속하여 문장 구성, 문법 등에서 유사한 특징을 가진 나라, 낯선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이라도 나누어 주는 따뜻하고 친절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 동양과 서양의 길목에서 동서(東西)·고금(古今)·성속(聖俗)의 문화를 함께 어우르고 있는 나라, 그래서 전국토가 야외 박물관 같은 나라, 마치 흥망성쇠의 세계사를 축약하여 기록한 것 같은 아나톨리아 반도국의 나라 등등.
터키 관련 서적과 인터넷,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각종 자료를 검토하고, 이스탄불을 시작으로 하여 터키 서남부를 거쳐 내륙지방 카파도키아를 경유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10일간의 여행을 계획하였다. 터키의 유럽지역에서 아시아로 이동하는 것은 배편을 이용하고, 마지막 카파도키아에서 이스탄불로 오는 것은 비행기를, 나머지 전 과정은 전용버스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제1일 : 8월 5일(월) - 서울에서 이스탄블로

2002년 8월 5일 오전 11시 15분, 지구촌 축제 한마당으로 벌어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 일행 44명은 10일 간의 터기 여행을 위하여 이스탄블행 터키항공(TK 091편) 트랩을 올랐다. 이 날 같은 비행기에 월드컵의 4강 신화를 이룬 태극전사 중 하나인 이을용 선수가 터키에 진출하게 되어 우리와 동승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우리는 모두 환호성을 질렀고, 한 동안 사인의 받느라 비행기 내에서 줄을 서는 진풍경을 연출하였다.
터키에 관련된 온갖 호기심으로 들떠 있는 동안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11시간의 비행 끝에, 현지 시간 17시 정각 이스탄불 공항에 안착했다.
이스탄블 입국장에는 이을용 선수를 환영하는 인파가 현수막을 든 채 몰려 있었다. 축구에 열광하는 터키 국민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이 선수가 입국장을 빠져나오자 입국장은 순간 함성과 구호로 출렁거렸다. '대한민국, 오∼필승 코리아' '이을용 선수를 환영합니다.' 한국 선수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것에 뿌듯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며 대기 중인 버스에 올랐다.

세계의 중심 이스탄블

여름 날씨답게 날씨는 무더웠으나, 이스탄블의 첫 인상은 국제도시로서 상업과 문화, 금융의 중심지답게 활기가 있어 보였다.
이스탄블은 3,500㎢의 면적에 인구가 1,200만 명이나 되는 터키의 제1도시이며, 아시아와 유럽의 양 대륙에 걸쳐 있는 유일한 도시이다. 유럽 쪽에서 볼 때 이스탄블은 유럽의 남동쪽에 있다. 도시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유럽쪽에 있는 두 부분 즉 골든 혼의 남쪽 지역에 있는 역사적인 반도(구시가지)와 북쪽의 갈라타 지역(신시가지), 그리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쪽의 아시아 지역이다. 유럽 지역은 상업의 중심지이며, 반면에 아시아 지역은 거주 지역이다. 이스탄불은 북쪽의 흑해와 마르마르해를 잇고, 유럽과 아시아를 양분하는 보스포러스의 양쪽에 건설된 셈이다.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 때문에 세계 역사의 초점이 되었던 이스탄블은 도시의 이름이 처음에는 이 도시를 건설한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움으로 명명되었다가, 4세기 초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동부지역의 수도가 되면서 콘스탄티노플로 바뀌었고, 1453년 오스만이 이 도시를 정복한 후에는 이스탄블로 불리면서, 로마, 비잔틴,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제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교회사적으로는 서기 500년대 이래 오늘까지 동방정교회의 수장(首長)인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방정교회(Easten Orthodox Church)는 카톨릭, 개신교와 함께 기독교 3대 줄기 중의 하나이다.
이스탄블은 1,600여 년 간 양대 제국의 수도라는 역사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제국의 건설이라는 꿈과 함께 고도의 높은 문명을 일으켰고, 제국의 황제들과 술탄들은 훌륭한 예술품과 건축물로 이 도시를 치장했다. 따라서 많은 유적과 유물들을 남기게 되었다.
따라서 역사의 도시라 부르는 이스탄블은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 만들어진 각종 건축물과 기념비들과 터키 이스람 시대의 가장 훌륭한 유적들이 공존하고 있어, 파리, 로마, 런던처럼 세계에서 가장 크고 흥미 있는 야외박물관 중의 하나이다.
저녁식사 시간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어서 구시가지 언덕 위에 있는 웅장한 블루 모스크와 성 소피아성당(아야 소피아 박물관) 앞에서 이를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한 뒤, 언덕 아래에 있는 시장 구경을 하고, 곧바로 근처에 있는 한국 식당 '한국관'에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터키의 중심이자 많은 유적과 유물을 간직하고 있는 이스탄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천혜의 자연항 보스포러스 해협의 아름다움 등 본격적인 이스탄블 관광은 여행의 막바지에 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설레는 가슴을 안고 프린세스 마스락 호텔에 짐을 풀고 터키의 첫밤을 보냈다.


제2일 : 8월 6일(화) - 차낙칼레를 거쳐 디킬리로

이스탄불의 하늘은 서울보다 높고 맑았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터키 여행이 시작되는 날이다. 전용버스를 타고 먼 거리를 육로로 이동하기 때문에 간편한 차림을 하고 버스에 올랐다.

다다넬스 해협을 건너서

호텔을 떠난 버스는 아시아 지역의 관광을 위하여 터키의 유럽령 지역의 넓게 펼쳐진 평원을 따라 남서쪽으로 계속 달렸다. 트로이로 가기 위해서다. 터키 고도(古都) 이스탄블에서 트로이까지 350㎞. 제법 긴 여정이었지만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주변 풍경이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르마라해(海)를 따라 이어지는 옥빛 바다와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건기(乾期)에 속하는 터키의 들판은 풀들이 거의 말라 황량하게 보였으나 스프링쿨러가 작동되는 밭은 초록색을 띄고 있었다. 도로의 양쪽으로 지중해 지역 특유의 해바라기 밭이 우리를 환영하듯 끝없이 이어져 있어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런 풍경들은 트로이가 갖고 있는 전설과 신화처럼 신비하고도 눈부셨다.
대량으로 재배되는 해바라기는 한국에서 보는 것보다 키가 작은 것이 특징이었는데, 꽃이 지면서 씨가 막 영글고 있는 중이었다. 해바라기 씨는 터키인들에게 중요한 식용 기름을 제공할뿐더러 좋은 간식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길거리에 흩어져 있는 껍질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중간에 잠시 들른 휴게소는 한국의 휴게소와는 달리 한적한 편이었다. 어디에서나 보는 풍경처럼 일행의 무리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터키의 화장실은 대부분 유료로 운영되는데 사용료는 터키 화폐로 25만 리라로 그 액수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터키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엄청난 환율에 기겁을 하게 된다. 2002년 8월 현재 터키 리라화의 대미화 환율은 백만 리라를 훨씬 넘고 있었다. 장소에 따라 미화 1불을 내면 4명∼5명 정도 입장이 허용된다. 생전 처음 이번 여행에 돈을 물 쓰듯이 써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일행 중 한 분이 우리에게 사과차 한 잔씩을 대접했다. 새콤한 맛으로 차를 마시기 좋아하는 터키인들이 개발한 것인데, 오히려 터키인들은 사과차보다 홍차를 즐겨 마신다.
약 4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곳은 겔리폴리(Kilitbahir)였다. 작은 항구 도시 갤리폴리는 다다넬즈 해협(마르마라 해협과 에게해를 잇는 해협)을 건너 차낙칼레(트로이)로 가는 배를 승선하는 곳이다. 트로이는 갤리폴리 앞 차낙칼레 지방에 속해 있다. 바다 건너 바다에 연해 있는 식당 겔리폴리에서 터키식으로 점심을 먹고, 카페리를 이용하여 다다넬즈 해협(폭은 약 1㎞)을 건넜다. 페리포트(Feribot)라는 이름이 새겨진 3백톤 급의 배는 여객과 자동차를 싣고 차낙칼레 쪽으로 미끄러져 갔다. '지구상의 모든 물이 마른다 해도 당신은 차낙칼레에서 잡은 신선한 생선을 맛볼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지는 다다넬즈의 물을 보고 있노라면, 이 해협을 건넜던 페르시아 황제인 시루스와 세르세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레스보스의 사포,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오 등 많은 역사적인 인물들이 기억에 떠올랐다. 그들이 야망과 꿈, 사랑의 가슴으로 건넜던 해협을 지금 우리가 건너고 있는 것이다.

트로이 목마가 있는 트루바

해협을 건너면 터키의 아시아 땅이다. 차낙칼레 항구는 어수선함보다는 평온한 도시였다. 우리는 차낙칼레 항구에서 아시아 땅을 다시 버스로 달려 30여㎞나 떨어진 트로이(Troy)의 현 지명인 트루바(Truva)에 도착했다. 도로 주변에는 푸른 초원과 양떼가 어우러진 전형적인 터키 시골 풍경이 이이어져 있었다. 초원 사이사이 수백년이 넘는 듯한 고목도 눈에 띄었다. 트루바라는 표지판이 나타나면서 언덕 너머로 희미한 말 그림자가 보였다. 일행 중 누군가가 트로이 목마의 울음소리가 들리느냐고 농담을 던졌다.
트로이 목마와 관련된 트로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 영웅 서사시 일리아드(Liad)와 오딧세이(Odyssey)에 전해 내려온 그리스군과 트로이군 간의 격렬했던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인을 찾기 위해 스파르타로 가서, 스파르타의 메넬라우스왕의 왕비 헬렌을 훔쳐 도망한다. 이에 격분한 메넬리우스가 그리스왕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에 원정을 가 10년간의 장기전이 계속된다. 트로이가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그리스군은 오디세우스가 고안한 커다란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 성 밖에 갖다 놓았다. 계략에 깜쪽같이 속은 트로이 군사들은 전쟁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간 사이, 한밤중에 목마에 숨어 있던 그리스 군사들이 목마에서 나와 성 안에 불을 지르고 파괴하여 난공불락이던 트로이를 함락한다는 내용이다.
그 옛날 밤을 새우며 읽었던 그 작품의 무대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언덕 너머로 짙은 나무색의 장엄한 모습으로 서 있는 트로이 목마가 순간 눈 앞에 나타났다. 높이 30m 정도의 목마는 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주인공답게 의연한 모습으로 들판 가운데 서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목마는 1971년에 만든 모형이라고 했다.
우리는 먼저 트루이의 흔적이 있는 유물 발굴지로 걸음을 옮겼다. 트로이 유적지는 크기가 약 1만평 정도로 주변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에 있었다. 토로이 입구에서 바라보는 트로이는 황폐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곳이 유적지임을 알게 해주는 것은 1기에서 9기까지 시대별로 분류한 표지판 정도에 불과했다. 유적지 안쪽으로 들어가자 아직도 발굴이 계속되는 듯한 흙구덩이 속 깊숙한 곳에 굵은 대리석 기둥과 담들이 보였다.
트로이 유적은 호메로스의 영웅 서사시 일리아드를 토대로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1870∼1873년에 걸친 발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한 서사시가 아니라 실제인물과 상황 속에서 그려진 사실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트로이 유적지는 시대에 따라 1기에서 9기까지 각각 다른 트로이 문명권으로 나눠져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트로이 유적은 모두 9층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모두 시대를 달리하여 세워진 도시 유적으로서, 가장 오래된 시기는 제1층의 것으로 기원전 3000∼2500년경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트로이가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은 서기 300년쯤. 그러므로 트로이는 전체적으로 볼 때 한 자리에서 3천 3백년간 각각 다른 9개 왕조가 번성과 멸망을 반복한 셈이다. 이런 일은 세계 역사상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98년 세계 문화 유산이 됐다.
트로이 유적은 이미 알려진 트로이 목마의 명성에 비해 남아 있는 것이 빈약한 편이어서 기대를 걸고 찾아간 관광객들은 실망하기 쉽다.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폐허 위에 세워진 안내판으로 그 옛날의 역사와 흔적들을 가늠해 볼 수밖에 없다. 다만 유적 중 비교적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원형 극장 두 개, 대극장과 소극장이라고 부르는 이 원형극장은 기원전 2세기에 만든 트로이 9기 때의 것이란다. 원형극장을 둘러보고 나온 화단에는 찬란했던 역사를 말해주듯 붉은 양귀비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흔적만 남은 역사와 양귀비꽃, 모든 영화가 결코 영원할 수 없는 한 순간의 꿈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올리브 나무 그늘에서 땀을 식힌 우리는 그나마 트로이 입구에 상징물로 세워 놓은 커다란 목마로 향했다. 목마는 눈요기로 볼 만하여 우리를 포함한 관광객들은 이를 배경으로 열심히 기념사진 찍기에 바빴다. 과연 프리암 왕국의 난공불락의 철옹성 트로이를 함락시키는데 실제로 목마가 등장했을까? 목마의 내부는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 2층 합쳐 고작 50여 명밖에 들어갈 수 없는데 프리암 왕국을 기습한 그리스 특공대가 겨우 50명이라니?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트로이 목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신화요 전설일 뿐 사실 여부는 아직까지도 베일에 가려 있다는 것이었다.
트로이 유적 답사를 끝낸 우리는 트로이를 떠나 에게해의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아소스(앗소) 지역을 통과했다. 이 도시는 기원전 8세기 경 히타이트 왕 투탈리아 4세 때 세워진 고대 항구도시로서 바울이 전도여행 때 들른 곳(행 20:13, 14)인데, 지금은 옛 명성을 잃은 채 초라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피서객들이 수영을 즐기는 에게해 해안을 따라 아이발릭을 지나 디킬리로 향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산과 들에 끝없이 펼쳐진 올리브 나무들의 반짝이는 잎새가 에게해의 물결과 어울려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건기임에도 불구하고 비탈이나 평지에서 잘 자라는 올리브 나무는 이곳 터키에서는 효자나무였다. 터키는 세계 제1의 올리브 생산국으로 국가 경제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 도착한 미시아 호텔은 에게해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호텔 바로 앞 뜰에 깨끗하고 아담한 수영장이 마련되어 있고, 그 옆 야외식당에서 일몰을 감상하며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모두 탄성을 질렀고, 여행의 멋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또 저녁식사 후 어둠이 내리는 시간에 삼삼오오 파도가 발밑에서 부서지는 해안의 모래사장을 거닐면서 이국의 정서에 빠져들 수 있었다.


제3일 : 8월 7일(수) - 버가모, 이즈미르를 찾아서

오늘의 관광 일정은 버가모(현재의 이름은 베르가마), 서머나(현재의 이름은 이즈미르)를 거쳐 쿠사다시에서 여장을 푸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성지(聖地) 둘러보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보통 소아시아 반도로 알려진 터키에는 성서에 나오는 지명들이 많다. 노아의 방주와 아라랏 산(현재 이름은 아으르 산), 기독교 초대 일곱 교회와 기독교가 박해받던 초대교회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피난처로 사용했던 지하도시와과 지하교회가 있는 중부 내륙지방의 카파도키아, 지중해 연안 도시 안디옥(현재의 이름 안타키아) 등이 있어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성지이다. 터키의 동부지역에 있는 아라랏 산과 중남부 지중해 해안의 안디옥은 이번 여행 일정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그런 대로 성지를 두루 둘러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자못 기대가 컸다.

신전과 학문의 도시 버가모(베르가마)

버가모의 고대 도시명은 페르가몬으로, 이 도시의 유래는 트로이 전쟁시로 올라가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알렉산더 시대부터로, 그후 로마가 이 지역을 정복하기 전까지인 기원전 4∼1세기경이 전성기였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그의 막료였던 리시마쿠스는 버가모가 천연적 요새에 위치고 있음을 깨닫고 산의 정상에 성을 쌓고 아크로폴리스를 형성하였다.
그 후 리시마쿠스의 죽음은 결국 페르가뭄 왕국을 탕생시키게 되었고, 그래서 버가모는 페르가몬 왕국 시대로부터 로마 시대를 거쳐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왕국의 중심지로서 산업과 무역이 활발하였고 문화와 의학의 도시로 번영하였다. 곳곳에 황제신의 숭배와 관련이 있는 많은 신전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권력과 영화가 극치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도시에 들어서면 경사가 심한 산꼭대기에 거대한 버가모 왕국의 유적이 나타나는데, 그 정상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전설의 나라에 찾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세계 최초의 종합병원 아스클레피온

버가모에 들어서서 먼저 찾아간 곳이 시내 입구에 있는 세계 최초의 종합병원 아스클레피온이다. 아스클레피온이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료의 신 아스클레피우스에서 유래한다. 이 병원은 고대의 가장 위대한 내과 의사이자 의료 과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갈리누스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1967년에 발굴된 이 건축물은 기원전 4세기경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기원 후 4세기경까지 약 800년간 소아시아에서 의료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도 이곳에서 일했다고 하니 보통의 병원은 아닌 게 분명했다.
아스클레피온은 헬레니즘 시대의 건축 구조물로 병원 진입로는 폭 20m, 길이 820m인 대로가 한 줄로 길게 뻗어 있으며, 길 양편에는 15m의 석주(石柱)가 세워져 있어 거대한 도시국가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병원은 현대적 의미로 일반치료는 물론 명상 요법, 음악 요법, 목욕 요법, 심리 요법, 운동 요법, 일광욕, 맨발 걷기 요법등으로 치료하였다고 한다. 과학 연구센터로 알려진 입구에 있는 도서관, 병원 입구로부터 이어지는 대리석 대로(大路), 환자들에게 삶의 의욕과 희망을 주기 위한 야외 원형 극장, 이오니아식 주랑(柱廊), 정신 치료를 위한 터널과 외래 환자 진료실로 사용되었던 텔레스포루스 신전 등이 방대한 중앙 정원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런 시설들이 다양한 요법으로 사용된 시설물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 당시 환자들을 위하여 이처럼 다양한 요법의 치료 방법을 이용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 병원 건물은 지진으로 대파되었으나 아직도 그 잔해가 남아 웅장한 규모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산정(山頂)에 세워진 아크로폴리스 왕궁

아스클레피온을 둘러본 우리는 산꼭대기에 있는 거대한 버가모 왕국의 유적을 보기 위해 산정에 오르기로 하였다. 우리가 탄 버스는 경사가 심한 나선형(螺旋形) 산길을 돌아 힘겹게 정상에 올랐다. 산정에 올라 보니 시내는 물론이고 먼 곳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버가모가 지형적으로 천연적인 요새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주위의 장엄한 경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가파른 언덕 끝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성채(城砦)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사실 이 성은 고대에는 적들에 의해 점령당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산 정상의 아크로폴리스 왕궁은 비록 지금은 지진과 전쟁으로 많이 파괴되었으나, 복원 작업에 힘입어 그 규모가 드러남으로써 왕궁이 방대한 지역에 걸쳐 웅대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였다. 그 곳에는 제우스 신전, 디오니소스 신전, 아데나 신전, 트라야누스 신전, 도서관 등이 자리잡고 있었고, 고대에 지어진 웅장한 도서관에는 이십만 권의 장서를 소장하였다고 한다.
성벽 옆에 세워진 아데나 신전은 당시의 뛰어난 석공예 기술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낮은 테라스에는 현재 세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는데, 그 자리가 바로 제우스 신전이 있던 장소라고 설명해 주었다. 아크로폴리스의 가장 높은 곳으로 가다보면 저수지와 성벽과 병기고를 볼 수 있으며, 또 비스듬한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한 헬레니즘 원형 극장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가는 곳마다 대형 원형극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버가모 교회의 자취

산정을 둘러보고 내려온 우리는 마을 한 가운데 붉은 벽돌로 지어진 태양의 신 세라피스 신전을 볼 수 있었다. 이 신전은 2세기에 이집트의 신 세라피스를 위해 지은 것이어서 이집트 신전이라고도 하며, 붉은 벽돌로 지어져 '크즐 아블루'라고도 불린다. 이 신전의 규모는 가로 100m, 세로 260m에 이르고, 높이도 20여m에 달해 그 규모가 매우 웅장한 편이다. 현재는 건축물의 벽채만 남아 있지만, 그 벽채의 모습만으로도 이 신전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신전은 기독교의 공인 이후 기독교 교회로 전환되어 버가모 교회로 사용되다가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함께 교회의 역할도 사라지고, 지금은 이 건축물 한 쪽을 이스람 사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허물어진 건물 앞에서 동행한 김봉현 목사가 요한계시록 2장 12절-13절에 있는 버가모 교회에 주는 글을 낭독해 주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位)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신전이 무수히 산재해 있는 도시, 그 속에서 황제신의 숭배를 거절한 버가모의 기독교인들, 버가모 교회는 당시 우상 숭배가 극심한 상황에서 순교자들이 속출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리스도를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칭찬을 받기도 한 교회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버가모 교회가 지금은 황폐화되고, 일부의 건물이 이스람 사원으로 사용되는 형편을 생각할 때 필자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일행은 버가모 교회를 뒤로 하고, 대리석 조각돌을 짜맞춰 깔아놓은 거리를 지나 예약된 식당에서 터키 음식으로 점심을 하였다. 등나무로 그늘을 만든 야외식당에서 점심을 마친 우리는 서둘러 다음 행선지 서머나(이즈미르)로 출발하였다.

에게해 연안의 항구도시 서머나(이즈미르)

서머나(Smyma)의 현재 이름은 이즈미르(Izmir)이며, 이스탄불과 앙카라에 이어 터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서 매년 가을 국제 무역박람회가 열리는 상업 중심지이다. 에게해 연안의 천혜의 요충지에 위치한 서머나는 터키의 모든 수출입 물자의 창구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 산업과 경제의 항구 도시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농산물, 특히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향기가 짙은 담배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와 말린 무화과의 수출지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 도시의 최초 정착민은 기원전 10세기경 에올리아 헬라인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기원전 300년경에 본격적인 도시로 발전하였고, 기원전 700년 전에 살았던 그리스 최대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의 작가 호메로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서머나는 그후 이오니아인, 리디아인, 페르시아인 등으로 주인이 계속 바뀌었고, 로마 제국이 이 도시를 정복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소아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은 파고스 산(현재의 카디페칼레)에 거대한 성채를 쌓고 새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몇 차례의 지진과 약탈 등이 자행된 데다 서기 178년에 이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서머나는 또 한번 크게 파괴되었다. 그 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황제의 도시 재건을 위한 지원에 힘입어 다시 재건되었고,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 가장 활발한 항구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1415년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어 1535년 오스만 제국의 슐레이만 황제가 프랑스와 최초의 상업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외국인 상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거리의 모습이나 건물들이 유럽풍을 많이 풍기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 제1차 세계대전 시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의 침공을 받았으나, 이에 맞선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군대가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함으로써 다시 터키인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서머나는 이러한 변화무쌍한 역사적인 변천에도 불구하고 그 지리적인 중요성 때문에 계속 번영하였다. 한때 비잔틴 제국은 도시 곳곳에 기독교 유적을 많이 남겨 놓았으나, 아랍 및 터키인들의 침략으로 기독교 유적은 거의 사라졌으며, 수 차례의 자연 재난과 빠른 도시화의 영향으로 거의 모든 고대 유적지는 대파되었으나 서머나는 오늘도 여전히 옛날의 영화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성화로 장식된 폴리갑의 기념교회

기독교 초기에 서머나(Smyma)에는 사도 바울의 전도 활동으로 초대 교회가 세워졌다. 현재 서머나에는 86세 때 순교한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의 기념교회가 시내 에페스 호텔 맞은 편에 있다.
요한계시록 상의 서머나 교회는 아마도 폴리갑 순교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교회는 당시 종교적으로 전통주의 유대인들의 공격과 정치적으로 극심한 황제 숭배 강요, 경제적으로 심한 빈곤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에게 죽도록 충성함으로써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교회였다.(계 2장 (-10절)
서머나 교회가 배출한 인물은 순교자 폴리갑(Polycap)이다. 서기 2세기 전반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폴리갑은 교회의 감독을 지냈다. 폴리갑은 교회가 환난을 당할 때 체포되어 그 곳 로마 총독 앞으로 끌려 갔다. 그의 나이 이미 86세였다. 총독은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 "내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폴리갑은 대답했다.
"지난86년 동안 나는 예수님을 섬겼소. 그러나 그는 한번도 나를 버린 일이 없소. 어떻게 그를 모른다고 하여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욕되게 할 수 있겠소" 그는 이 유명한 말을 남기고화형을 받고 순교했다.
순교자 폴리갑을 기념하기 위해 1600년 프랑스 교구에서 재건한 교회가 폴리갑 기념교회이다. 우리는 쇠창살 문을 한 건물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교회의 관리자인 듯한 뚱뚱한 여인이문을 열어 주었다. 폴리갑 기념교회는 'SEN POLIKARP'이라 써 붙인 팻말 옆으로 난 작은 층계의 계단을 내려가 있었다.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교회 내부는 대리석 기둥으로 받혀져 웅장하게 보였고, 교회 안에는 폴리갑의 화형(火刑)을 묘사한 성화와 폴리갑의 생애와 관련된 성화가 그려져 있어 경건한 분위를 자아냈다.
이 성화들은 이 교회를 보수할 때 프랑스 화가 레이몽 페레가 그린 것인데, 불길에 싸인 폴리갑을 향해 한 사나이가 칼을 들고 달려들고 있고, 칼을 든 사람의 뒤편에는 또 한 사람의 순교자가 손이 묶인 채 체념한 표정으로 화형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형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화가 자신인 페레라고 한다. 화가 자신도 폴리갑의 뒤를 잇는 순교자로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폴리갑의 눈길은 하늘을 향하고 있는데, 페레의 눈길은 땅을 향하고 있어 두 사람의 표정을 대조적으로 그린 것이 흥미롭다. 오전에 버가모 교회의 보고 온 우리는 서머나의 폴리갑 기념 교회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진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의자에 앉아서 기도드린 우리 일행은 모두가 서머나 교회가 이토록 존재한다는 점에 감사했을 것이다. 안내자가 요한계시록의 서머나 교회에 주는 요한 계시록의 글을 낭독했고, 동행한 서능재 목사께서 은혜스러운 기도를 해 주었다.
가슴이 찡해올만큼 우리 모두가 감동에 젖어 있었다. 어떤 박해가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 칭찬을 받았던 서머나 교인들처럼 그 믿음을 본받을 것이라는 각오와 함께.

아타투르크 거리와 고고학 박물관

우리는 이어 각종 물건을 파는 시장 골목을 지나 히사르 모스크라는 이스람 사원을 찾아 갔다. 이스람 사원을 처음으로 방문한 우리 일행은 호기심에 차 있었다. 녹색 카페트가 깔린
사원 내부에서 몇 사람이 벽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는데, 관광객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내부의 천장에 그린 이스람 문양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장식이 별로 없었다.
이스람 사원을 나온 우리는 곧바로 해안에 조성되어 있는 공원에 하차하여 아타투르크 거리를 둘러 보았다. 아타투르크 거리는 번화가로서 도로 양측에는 야자나무 가로수가 늘어서 있고, 레스토랑이나 찻집, 식당들이 즐비했는데 거리의 중심부에는 아타투르크의 동상이 서 있었다. 정원은 산보하는 사람이 걸을 수 있도록 보도를 만들었고, 그 옆으로 넓은 잔디공원에는 조형조각품이 군데군데 놓여 있어 정원의 모습을 한층 아름답게 하고 있었다.
아타투르크는 '터키인의 아버지, 즉 국부(國父)'라는 뜻으로 터키공화국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을 지칭하는 말이다. 터키의 전신으로 방대한 영토를 가진 세계 최강의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독일이 패전하여 서구 강대국으로부터 침략을 받게 되자, 그는 터키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실지 회복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1923년 10월29일 터키공화국(정식 명칭: 튀르키예 줌후리예티)을 설립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케말리즘'이라 불리는 서구화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터키인들의 국부로 추앙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터키 내에 많은 것으로 보아 터키인의 그에 대한 존경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우리는 도시 서머나를 둘러싸고 있는 파고스 산 기슭에 올랐다. 현재 카디페칼레로 불리는 성채에 올라서면 서머나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택과 상점이 혼재되어 있는 언덕길을 올라 정상에 닿았다. 성채의 계단을 올라서니 말 그대로 서머나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터키의 세 번째 도시답게 건물들이 해안을 따라 넓게 자리잡고 있고, 항구에는 유람선과 상선들의 항해하는 모습이 평화롭게 보였다. 그리고 멀리 산 언덕에 즐비하게 짓고 있는 고층 아파트들은 급격한 도시화 현상을 실감케 해 주었다. 성채 안쪽으로 줄을 맨 소나무에는 울긋불긋한 카페트를 걸어놓고 여인들은 소나무 밑에 앉아 묵묵히 카페트를 짜고 있었다.
이어서 서머나의 고고학 박물관에서 우리는 주변의 많은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전주의 시대의 중요한 동상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시대의 조각을 위주로 진열되어 있었는데, 눈길을 끄는 것은 그리스 신 디미테르와 로마의 신 아르테미스의 큰 동상이었다. 고대 아고라에 서 있던 포세이돈, 데메테르 상 등 고대 최대의 소장품을 여기서 만난 것은 우리에게 큰 행운이었다.
버가모, 서머나를 둘러본 우리는 다시 에게해 지역에 있는 가장 매력적인 리조트 타운에서 1박을 한다는 기쁨으로 버스에 올랐다. 터키어로 '새들의 천국'이란 뜻을 가진 쿠사다시는 에게해 연안의 조그만 만(灣)에 건설된 해양 도시로서 황금빛의 해변을 끼고 수많은 호텔, 방갈로, 펜션 등을 갖추고 있는 휴양객들의 천국이다.
우리가 짐을 푼 숙소는 낮은 해안 언덕에 있는 오누라(ONURA) 호텔로 특급 호텔이었는데, 역시 깨끗한 수영장이 있고 에게해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야외식당이 있어서 우리를 들뜨게 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바다로 이어지는데,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작은 배를 댈 수 있게 만든 계류장 끝에 앉아 찬란하게 조명을 밝힌 호텔의 야경과 쿠사다시 항구의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본 기억은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제4일 : 8월 8일(목) - 에베소 유적 탐방의 날

쿠사다시의 밤은 행복 속에 밝았다. 에게헤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 위해 이른 시간 호텔 밖으로 나왔다. 청명한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맞닿은 곳에서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의 일정은 에베소(에페스) 관광이 중심이었다.
에베소는 에게해안 도시 이즈미르에서 남쪽으로 약 74㎞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1세기 때만 해도 번창한 항구였으나, 흙이 씻겨 내려와 지금은 배가 드나들지 못하는 평지로 이어져 있다.

화려하고 정교한 도시 에베소

성경에 에베소로 표현되는 도시명은 에페스였다. 초기 에베소는 기원전 10세기에 이오니아인에 의해 카이스테르강 어귀에 건설되었다.
한때 에베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그후 BC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입성한 후로는 로마의 중요한 도시가 되어 번성기를 맞아 에게 해안에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로 화려하고 부유한 대도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살기 좋은 에베소는 철학, 문학, 역사 등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예술가와 돈 많은 상인들이 몰려와 한때 인구 25만 명을 가진 큰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에베소는 3세기에 고트족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이래로 도시의 중요성을 잃고 옛 영화를 찾지 못하다가 항구의 계속되는 침니 작용과 전염병의 만연으로 상업 활동도 급속히 쇠퇴해졌고, 계속된 지진으로 더욱 황폐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에베소의 전성기 때 많은 황제들은 정교하고 이국적인 건축물과 예술품으로 이 도시를 치장했다. 에베소는 도시 계획자 히포다무스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성공적인 도시 계획이 적용된 곳으로, 도시 에베소의 화려함은 대리석이 연출한 수많은 조각과 건축물이 대변하고 있다.
에베소는 동쪽의 마그네시아 문에서 서쪽의 고대 항구까지 연결되는데, 마그네시아 문은 3세기에 리시마쿠스에 의해 세워졌다. 마그네시아 문을 통해 유적지로 들어서면 높이 치솟은 벽과 둥근 지붕의 바리우스 목욕탕을 보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진보된 물 공급 시스템의 일부인 흙으로 만들어진 물 파이프의 잔해가 바로 근처에 있다. 2세기에 세워진 계단형으로 된 극장 오데온은 도시의 행정관들인 상원의원들의 집회 장소였다고 한다. 또 오데온 옆에는 기원전 3세기 아우구스투스 통치 때 세워진 시청 건물 프레타네이온이 있다.
시청 옆의 주요 거리인 크레테스 거리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특히 대리석으로 된 대로에는 마차길과 인도가 따로 구분되어 있고, 마차가 잘 굴러갈 수 있도록 대리석 양쪽에 긴 홈을 팠으며, 하수도 시설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 하수도는 도시의 모든 하수를 바다까지 운반하는데 사용되었다.
도미티안 신전은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의학의 상징으로써 뱀들이 서로 꼬여 있는 모양의 지팡이) 부조물로 장식된 2개의 동상 받침대 앞에 있다. 오른 쪽으로 도시의 수로를 만든 건축가 멤미우스를 위해 세운 멤미우스 기념비, 그 맞은 편에 도미티안 광장, 그 광장의 왼쪽에는 부분적으로 복구된 폴리오 분수가 있다.
또 헤라클레스 게이트를 지나서 가다보면 길 양 옆으로 화려한 동상 받침대와 기둥들이 있고, 이어지는 상점들과 크레테스 거리의 아래 부분에는 로마 황제 트라잔에 의해 세워진 기념 분수가 있다. 그리고 개인 주택들과 네 개의 중요부분을 갖춘 전형적인 로마 목욕탕,
목욕탕 옆으로 2세기에 지어진 고린도 양식의 하드리안 신전은 독특한 부조물과 장식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끈다. 신전 옆으로 난 거리에 세워진 잘 보존된 공중 화장실은 에베소의 공동체 생활의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더 내려가서 오른쪽에 있는 대리석 거리로 들어서면 창녀의 집이 있다. 이 거리에는 대리석 인도 위에 머리를 단장한 여자의 얼굴, 하트 모양, 조그만 동그라미와 발모양을 음각한 광고물이 설치되어 항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곽(遊廓)이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이야말로 세계 최초의 광고물이 아닐까.
또 하나, 크레테스 거리와 대리석 도로의 교차로에 위치한 셀수스 도서관(일명 두란노)이 있다. 이 도서관은 서기 110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35년에 완공한 건축물로 에베소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 만 권 이상의 책을 소장하고 있던 이 도서관으로 에베소는 학문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일찍이 에베소에서 활동했던 희랍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학문 전통을 이어온 곳으로, 로마 제국 내의 최대 도서관의 하나이다.



아래 시장구역인 아고라(Agora)는 사방 100m 넓이의 사각형 구조로 되어 있는데 아고라의 기념문은 도서관 바로 옆에 있다. 국제적인 상업 도시인 에베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대리석 도로 끝 오른쪽에 에베소의 야외 원형극장 있는데 2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극장 중의 하나이다. 이 원형극장은 기원전 3세기경에 건축되어 로마 시대에 수차 확대되었는데, 3단 형태의 구조로 각 단은 22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에베소에서 해마다 열리는 페스티발 기간에는 이 원형극장에서 콘서트가 열렸으며, 사도 바울이 서기 53년에 에베소에 도착하여 이 곳에서 설교를 하였다고 한다.
또 항구 도로라 불리는 아카디안 거리 주변에도 각종 시설물로 가득 차 있는데, 정교한 도시 계획에 따라 수많은 조각과 건축물로 연출한 에베소는 한 마디로 놀라움의 극치였다. 이런 이유로 에베소는 세계에서 가장 매력 있고 광대한 고대 유적지이며, 관광객 모두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곳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 아르테미스 신전

그러나 에베소 사람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무엇보다도 여신 아르테미스 신전이었다. 에베소 사람들은 희랍신화의 최고신 제우스의 딸인 아르테미스(Artemis)여신을 수호신으로 섬겼다. 다산(多産)과 풍요를 가져다 주는 이 여신을 위해서 그들은 일찍이 신전을 건축하였다.
에베소 사람들은 유방이 스물 네 개 달린 이 여신을 위해 기원전 580년에 지금의 셀축과 쿠사다시를 잇는 도로의 한 쪽에 아르테미스 신전을 건축하였다. 아르테미스 여신을 모신 신전은 화려하고 장대하여, 폭과 길이가 200×425m, 높이가 20m, 133개의 기둥으로 세워졌으며, 그 돌기둥의 직경은 무려 1.85m였다고 한다.
이 신전은 기원전 356년 한 정신병자에 의해 방화로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안겨 주었다.
"아르테미스 여신은 방화범이 자기 신전을 불태우는 것도 막지 못할 만큼 무력하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해 에베소 사람들은 이런 대답을 해주었다. "아르테미스 여신은 바로 그 때 외출 중이었다"고. 마케도니아에서 탄생한 알렉산더를 축하하기 위해서 그 곳에 간 것이라고. 아르테미스 신전이 불탈 당시 마침 알렉산더가 태어났던 것이다.
그후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에베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불타 파괴된 것을 보고 자기가 신전을 복구시켜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에베소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호신인 아르테미스 신전을 다른 사람의 손으로 재건하게 할 수는 없고, 또 정복자의 말을 거절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꾀를 내어 대답을 하였다.
"대왕이시여!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십니다. 신이 다른 신을 위해서 신전을 짓는다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신전을 재건하였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크고 웅대한 신전으로 다시 창건함으로써 이오니아 양식으로 지어진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히게 되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 신전은 에베소에서 천년 이상을 종교,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향 아래 그 빛을 잃게 된 후 에베소 앞에 흐르는 강물의 토사로 완전히 덮혀 땅 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1874년 영국인에 의해 발굴 작업이 진행된 후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으나 지진으로 다시 파괴되고 거대한 석주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져, 지금은 넓은 공터에 광범위한 유적들과 함께 높은 기둥 한 개만 덩그렇게 남아 있어, 한때 영광스러웠던 아르테미스 신전의 유일한 유물로써 남아 있다.

기독교 역사와 에베소

역사적으로 에베소는 기독교와 관련이 매우 깊은 곳이다. 본래 고대 소아시아의 풍요의 여신 아르데미스 여신을 모신 신전 가까이에 세워진 에베소는 동방 이교(異敎)의 중심지였는데, 초대교회 당시 사도 바울은 2차,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를 방문하여 이 곳에서 설교를 하였다.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전도 행적은 성경의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지역적인 특수성으로 보아 바울의 복음 전도는 많은 난관을 헤쳐 나가야 했다. 그러나 신앙의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헌신적인 도움과 바울이 아들처럼 사랑했던 디모데의 힘이 합해져서 에베소 전도는 좋은 결실을 맺었다. 그리하여 아르테미스 신전이 지배하던 도시는 차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변해 갔다.
또한 스데반의 순교 이후(AD 37-42년) 예수의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는데, 이 때 사도 요한은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왔다. 마리아를 모신 사도 요한은 얼마 동안 수리아 안디옥에 머물다가 에베소로 오게 되어, AD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서 에베소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으며, 도미티안 황제(81-96)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 속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그는 계시록을 썼다. 사도 요한은 100년경에 밧모섬의 귀양에서 돌아와 에베소에서 마리아와 함께 말년을 이 곳에서 보내다가 이 곳에서 죽었다.
에베소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개의 지도적 교회들에 대한 관활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도 요한의 활동 중심지였다. 즉 이 도시는 밧모섬으로부터 오는 편지의 도착지이면서 동시에 일곱 개 교회를 차례로 연결하는 도로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당시의 예베소 교회는 열심 있는 봉사와 수고, 이단 배격, 고난에 대한 인내로 말미암아 칭찬을 받았으나,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을 받기도 했다.(계 2:2-3) 다시 말하면, 교회에 만연하는 우상 숭배와 이단 사상에 대항하여 신앙의 순결은 굳게 지켰으나, 정통 교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참된 사랑의 정신을 상실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에베소 관광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 중의 하나는, 당시 바울이나 요한이 이 천박하고 배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복음의 전파를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누가의 묘와 성모 마리의 집

우리는 에베소 가까이에 누가의 묘가 있어 그 곳을 방문하였다. 이오나아식 건축양식에 따라 사방 16개의 기둥을 세워 사방 16m의 길이로 건축된 것인데 모두가 무너진 채로 있었고, 지금 복원작업이 한창이었다. 원래 이 건물은 로마 시대에 유명 용사나 건강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었다. 이후 비잔틴 시대에 그 구조를 변형시켜 예배 처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1860년 영국의 고고학자 T J Wood가 발굴된 십자가와 황소 모양이 그려진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임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또 에베소에서 약 11㎞ 거리의 파나야 카풀루(Panaya Kapulu)산 속으로 올라가면 성모 마리아의 집이 나온다. 요한복음 19장에는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모친 마리아를 모실 것을 당부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 요한을 따라 에베소로 갔으며, 이 성모 마리아의 집은 성모 마리아가 말년을 보내다가 승천한 곳이다.
역사적으로 에베소에서 마리아가 살었던 곳이 어디였을까 하는 것이 큰 수수께끼였다. 그런데 19세기 초 독일의 캐더린 에멀리히(Catherine Emmerich)라는 여자가 특별한 계시를 받아 찾아낸 것이다. 산 속에 폐허로 남아 있던 비잔틴 시대에 지은 작은 교회가 마리아가 살던 집터라는 것이다. 카톨릭 교회는 그 후 이 교회를 복원하였고,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카톨릭 교회의 성소로 공포하였다. 뒤에 교황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2세도 방문하여, 마리아의 집은 오늘날 크리스천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성지로 되어 있다.
에베소 도시 입구와 누가의 무덤, 성모 마라아의 집 앞에는 한국 관광객을 위하여 터키교민회에서 설치한 한글로 된 안내 간판이 반가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사도 요한교회

또 에베소에서 3㎞ 거리의 지척지간에 있는 셀축의 인근에 사도 요한 교회가 있다. 사도 요한 교회는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에베소에 기독교가 널리 퍼지자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를 건립하였는데, 그후 비잔틴제국의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대리석으로 다시 증축하였다. 그런데 13세기 셀축 터키가 이 지역을 점령한 후 방치되었다가 1402년 몽골의 침입 때 다시 파괴되었다고 한다.
건물 규모는 40×110m이며, 서쪽의 입구와 함께 동서쪽에 축을 두고 십자가 모양으로 배치되었다. 교회 왼쪽 북쪽에는 11세기에 만들어진 프레스코화가 있는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사제들의 교구로 사용되었던 이 방의 바로 왼쪽에는 귀중한 성물을 보관했던 작은 성물 보관소가 있다. 침례소는 현재 좋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현재 발굴된 유적만으로도 엄청남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에베소 관광을 끝낸 우리는 멀리 산꼭대기에 보이는 셀축성을 바라보며 전용버스 편으로 목화성(木花)의 성이라 불리는 온천 휴양지 파묵칼레로 이동하였다. 파묵칼레는 에베소에서 동남쪽으로 150여㎞ 떨어진 데니즐리에서 다시 북쪽으로 20여㎞ 들어간 곳에 있었다. 파묵칼레는 '목화의 성'이란 뜻인데 마치 목화송이로 덮힌 성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공교롭게도 파묵칼레 인근에는 목화를 재배하는 목화밭이 넓게 자리잡고 있어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호텔로 들어가는 마을의 집 지붕에는 빈병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습이 보였다. 이것은 그 집에 과년한 딸이 있다는 표시라고 한다. 병의 개수는 사람의 수를 나타낸다. 청년들은 그 집을 방문하여 차 대접을 받고, 차대접을 받으며 신부를 결정하는 독특한 풍습이었다.
우리가 묵을 호텔 이름이 콜로세 호텔이었는데, 이곳은 다른 곳과는 달리 로비에서 긴 복도를 통하여 연결한 별채로 된 숙소였다.
저녁을 마친 우리 일행은 9시 수영장 옆 야외 카페에서 일명 배꼽춤이라는 벨리 댄스 공연이 있다고 하여 밖으로 나갔다. 터키의 관광 홍보 책자에서 벨리 댄스를 추는 여인의 사진을 이미 본 터여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둥근 테이불에는 관광객들이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흥겨운 음악과 함께 반라(半裸)의 무희가 유연한 몸동작으로 관객을 압도했는데, 우리 일행 중 몇 사람이 무희의 파트너 노릇을 했다. 그 저녁 우리는 즐거웠고, 여행의 피로를 잠시나마 풀 수 있었다.


제5일 : 8월 9일(금) - 파묵칼레와 안탈랴

파묵칼레(pammukale)의 관광 초점은 성서 골로새서에서도 언급된 곳인데, 고대 도시 히에라폴리스와 자연이 만들어 낸 신기한 경치와 석화암 지대 노천온천이다.
2000년 전 로마시대에 형성된 고대 도시 파묵칼레라고 알려져 있는 자연의 일부분다. 기원전 190년 로마인들은 이 휴양지에 거대한 도시를 건설했다. 이 도시 이름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히에라폴리스는 치료 휴양의 도시이자 상업의 도시였다. 주변 어느 곳이나 목화밭을 볼 수 있듯이 이곳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모직 산업에 종사하였고, 섬유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세계적 관광지답게 대부분 광광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파묵칼레의 마을에 이르자 지붕에 유리병을 세워놓은 모습이 보였다. '우리 집에 과년한 딸이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딸의 숫자만큼 병을 세운다고 한다. 그러면 총각이 와서 차대접을 받고 예비 신랑이 처녀를 선택하는 독특한 풍습이다.
이 도시는 한때 인구가 8만 명에 이르렀으나 계속되는 지진, 아랍군의 침입, 셀주크 터키군과 비잔틴 제국 군사 간의 전쟁으로 도시는 급격히 황폐해 졌으며, 12세기 이래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시작된 발굴 작업으로 히에라폴리스 폐허는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먼저 히에라폴리스 유적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목화(木花)의 성 히에라폴리스

우리는 먼저 석회붕 위쪽으로 로마 시대에 세워진 야외 원형 극장을 비롯하여 교회, 공중목욕탕, 신전 등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유적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우리가 묵은 여관으로부터 이곳에 진입하려면, 먼저 산기슭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 1,200여 개의 대리석 석관(石棺)의 무더기를 지나게 되는데, 이곳이 '네크로폴리스'라 불리는 고대 도시의 유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이다. 예로부터 이 지역에서 나오는 온천수의 치료효과 때문에 수천 명의 환자들이 병치료를 위해 이곳 히에라폴리스에 왔다. 섭씨 35의 탄산수는 여러 질병에 효험이 있어 로마 황제들도 치료를 위해 이 곳을 찾았다고 한다. 다행이 병이 나은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낫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장례 습관에 따라 이 곳 도시의 광범위한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래서 네크로폴리스는 다양한 매장 방법과 고분, 뒤집어진 배모양의 리시아 석관, 집모양의 무덤 등 각기 다른 모양의 무덤들이 산재해 있다.
히에라폴리스에에서 가장 큰 볼거리는 2세기경에 건축된 1만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이다. 양 옆에 둥근 탑이 있는 기념문은 하드리안 황제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고, 그 뒤의 열 주랑이 있는 길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둥근 관객석 위에서 내려다 보는 파묵칼레의 전망은 정말 압권(壓卷)이다. 그리고 원형극장 아래로 온탕과 냉탕을 갖춘 로마 목욕탕이 있는데, 이 노천 목욕탕에서 이곳을 찾은 휴양객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고, 현재는 로마 목욕탕의 일부가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제자 빌립이 히에라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도시의 산기슭에는 빌립사도 순교 기념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빌립 사도가 기원 후 80년에 순교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그가 네 딸과 함께 순교당한 곳에 세워져 있다. 시간이 촉박하여 빌립교회를 찾아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놀라운 자연의 기적, 석회암 온천들



이곳에는 또 하나 이 곳만이 지닌 자연의 놀라운 기적이 있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어줍잖은 찬사를 거부하는 대자연의 걸작품이 이 곳에 있다. 목화성(木花城, Cotton Castle)이라 불리는 파묵칼레의 석회붕이 그것이다. 칼슘과 중탄산염이 함유된 온천수가 수 세기에 걸쳐 산봉우리로부터 흘러내려 계단식의 천연 목욕탕 모습이 되었다. 다량의 석회질을 담고 있는 온천수는 흘러내리면서 석회만 침전되어 마치 목화 같은 하얀 색의 대지를 만들고, 또 그 온천수가 흐르면서 군데군데 계단식으로 온천 웅덩이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만발한 목화송이로 뒤덮인 것 같다. 여명부터 석양까지 햇빛의 조도(照度)에 따라 시시각각 색깔이 변하는 파묵칼레는 신비한 느낌마저 든다. 자연이 만든 불가사의, 놀라운 자연의 기적을 창조한 것이다. 1990년대 초가지만 해도 이 웅덩이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노천온천은 지금도 수영장으로 이용되지만, 나머지는 모두 유네스코 세계 유산 지정과 함께 출입이 금지됐다. 과도한 개발로 인해 온천수가 줄어들어 무미건조한 하얀 석회붕만 자리하고 있는 형편이다. 다만 관광객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도랑이 있어, 우리 일행은 그 도랑으로 흐르는 따뜻한 광천수에 발을 담그고 맨발로 걸으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자연이 이루어 낸 기적들을 계속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난개발을 막고, 수자원을 보존하는 특별한 대책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의 7대 교회 라오디기아

히에라폴리스의 유적과 자연이 이룬 장관을 둘러본 우리는 히에라폴리스에서 7㎞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라오디게아를 찾아갔다. 이곳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가 있던 곳이다.
라오디기아는 소아시아의 프리지아(성서명 부르기아)의 수도로, 수리아의 셀리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2세가 이곳 리쿠스 골짜기의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서 현재명 라오디케아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이곳은 동서 교통로와 남북 교통로가 서로 교차하는 요충지로 군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각광을 받아온 곳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 풍요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이 곳 라오디기아에서 사용한 물은 히에라폴리스의 온천수였다. 온천수를 이 곳까지 끌어온 돌로 만든 수로(水路)가 지금도 일부 남아 있다. 그리고 고대 라오디게아에는 병원도 있었다. 특히 눈병을 고치는 안약의 산지로도 유명하다.
라오디기아 교회는 성경 골로새서(4:15)에 적은 내용으로 볼 때 이 지역 '눔바'라는 여자의 집에 교회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도시의 유적은 오늘날 거의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땅 속에 파묻힌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교회도 엉겅퀴 우거진 낮은 언덕에 무너진 돌무더기의 형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16)고 기록하고 있다. 신앙의 열도를 그 곳에 공급된 미지근한 물에 비교한 것이다. 또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보게 하라'(계 3:19)고 적고 있다. 이것은 이 지역의 특산품인 목화와 안약을 배경으로 라오디기아 교회를 책망하며 영적 빈곤 상태를 권면하는 말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무너진 교회터 위에서 나는 잠시 생각해 본다. 우리는 지금 라오디기아 교회처럼 물질적인 풍요함 때문에 영적 교만에 빠진 것은 아닌가? 책망만 받고 깨닫지 못하다가 결국 '토하여 내치는' 화(禍)를 자초하는 것은 아닐까? 영적인 만족보다 육신의 안락에 삶의 가치를 두고 사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던지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라오디기아 교회를 떠나는 발길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지중해의 세계적 관광도시 안탈랴(앗시리아)

우리는 아쉬움 속에 파묵칼레를 떠나 지중해 해변 휴양지인 안탈랴로 이동하여 터키 고유의 생선요리로 늦은 점심을 하였다. 터키가 세계 3대 요리국(중국, 프랑스, 터키)이란 말을 들어왔던 터에, 터키에 와서 처음 먹어보는 시푸드여서 크게 기대를 걸었다. 더구나 이곳은 지중해를 앞에 둔 항구 도시에서 일품의 생선요리를 먹어보다니, 그것도 늦은 점심이어서 시장기를 느낄 때가 아닌가. 그런데 결과는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철판에 구워 내놓은 새우, 오징어 튀김, 소금에 절인 멸치 등 생선류는 우리 입맛에는 몹씨 짜고, 야채샐러드는 독특한 터키향이 짙게 배어 있어 먹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마지막에 내놓은 생선구이는 소금만을 뿌려 구워달라고 특별히 주문한 탓인지 그런대로 먹기에 편했다. 그런 우리를 보고 식당 주인이 안절부절했다. 친구의 나라, 한국인에게 매우 미안하다는 듯이.
그런 그에게 '붉은 악마' 티셔스를 선물로 주었더니, 답례로 모자와 터키 국기로 답례를 주며 매우 즐거워했다.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터키인들의 환대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본격적인 안탈랴 관광의 오후 일정에 들어갔다.
안탈랴는 터키내 최고의 해양 관광지이며 휴양지이다. 동서로 뻗어 있는 해안에는100여개에 이르는 고대 도시가 있어 유물들이 산재해 있다고 한다. 야자 가로수가 늘어선 큰길과 마리나가 있는 매력적인 도시.
안탈랴는 기원전 2세기 페르가몬왕 아탈로스 2세가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그의 이름을 따서 아텔레이아라고 명명한 곳으로, 성서상의 이름은 앗시리아이다. 먼저 안탈랴 고고학 박물관을 보기로 하였다. 이 고고학 박물관은 선사 시대의 유물과 헬레니즘 시대, 로마와 비잔틴 시대의 유물들, 그리고 셀주크와 오스만투르크의 다양한 유물들이 연대순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특히 전시물 중에는 예수의 제자들을 그린 성화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박물관 관광을 끝낸 우리는 곧바로 바닷가로 나왔다. 그 도시에 잇달아 길게 넓게 펼쳐진 공원과 해변은 짙푸른 빛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지중해는 우리가 보고온 에게해와는 또 달랐다. 짙푸른 비취빛 바다에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은 편이었는데도 해변에는 즐비하게 늘어선 비치 파라솔이 숲을 이루고 있었고, 그 뒤로 수영을 즐기는 피서객들로 북적거렸다. 우리 일행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바빴고, 몇 사람은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푸른 물 속으로 뛰어들어 발을 담궜다.
안탈랴 도시의 중심부에는 13세기 초 셀주크 터키인들이 세운 이블리미나레(사원)가 안탈랴의 상징처럼 서 있다. 이블리미나레는 45m 높이의 첨탑을 지니고 있어 안탈랴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이정표 역할을 해 주고 있다. 사각 받침대 위에 만들어진 벽돌 첨탑은 세로로 홈이 파져 있고, 모자이크 형태로 된 푸른 돌과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본래 동로마 시대 교회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는데, 셀주크 왕조시대에 이스람 사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첨탑을 세운 것이라 한다. 오늘날 보이는 사원은 교회터 위에 14세기에 지어진 것이었다.
또 안탈랴에는 기원전 130년 하드리안 황제가 안탈랴를 침입했을 때 그의 영예를 칭송하여 세 개의 아름다운 아치형 문이 성벽 안에 만들어졌는데, 2천년이 지난 지금도 항구 근처에 이 문과 성벽의 다른 부분을 나누는 두 개의 탑이 남아 있다. 칼레카푸스 광장에 있는 시계탑도 오래된 요새의 일부이다. 이 시계탑은 항구를 드나드는 배들을 감시하는 탑으로 사용된 것이라 한다.
우리는 걸어서 아타투르크 공원과 웅장한 하드리안게이트(개선문)를 지나 칼레이치(구 도시)로 들어 섰다. 고대 로마 시대에 세운 성벽과 인접한 곳에 있는 칼레이치 지역은 좁고 구부러진 길, 오래된 목조 가옥들이 있어 아름다운 옛 모습이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아늑하게 보이는 집들은 지금은 대부분 분위기 좋은 카페나 음식점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안탈랴의 젊은이들이 가장 찾고 싶어하는 데이트 장소라고 한다.
푸른 지중해 해안에 접해 있는 칼라리올 공원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고, 공원은 눈부신 바다와 이어져 있고, 또 바다 뒤로 산들이 이어져 있어 그 풍치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지중해의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다.
관광을 마치고 우리는 호텔(IC HOTEL)로 돌아와 품격 높은 저녁식사를 하였다. 8월말로 퇴임하는 필자를 위하여 식사 시간에 특별 이벤트를 마련한 것이다. 이국의 호텔 뷔페식당에서 각 나라에서 몰려든 많은 관광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말이다. 이 분위기는 식사 후에도 이어졌다. 호텔 후원 수영장을 끼고 있는 잔디밭으로 이동한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이국의 밤하늘에 불꽃을 밝히며 우정이 넘치는 정감 어린 노래를 함께 불렀다. 지중해 연안 안탈랴의 밤은 많은 추억을 간직한 채 그렇게 깊어 갔다.


제6일 : 8월 10일(토) - 콘야를 거쳐 카파도키아로

오늘은 안탈랴를 출발하여 콘야를 경우, 네브세히르(카파도키아)에 도착하는 긴 여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거리므로 다른 날보다 일찍 서둘러 출발했다. 콘야로 가기전 먼저 들른 곳은 안탈랴에서 동쪽으로 47㎞ 지점에 있는 아스펜도스. 안탈랴 권내(圈內)에 있는 것인데 어제의 일정이 바빠서 남겨둔 곳이었다.

멋진 로마의 원형극장 아스펜도스

아스펜도스는 고대 유리메돈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는 아르고스에서 온 이주민들에 의해 세워졌고,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로마 극장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5세기에 아스펜도스는 시데와 아울러 은동전을 주조할 권리를 가진 유일한 도시들이었다. 도시 성벽은 헬레니즘 시대에 세워졌고, 로마와 비잔틴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번 복구되었다 한다.
아스펜도스 극장은 약 2만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의 극장인데, 로마 시대(AD 2세기 후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AD 121-180) 황제 재임시에 유명한 건축가 제논에 의해 세워졌다. 고대에 세워진 극장 중 보존이 가장 잘 된 것이다. 관중석의 일부는 아크로폴리스 열의 언덕에 의지하여 만들어졌고, 나머지 부분은 둥근 지붕이 있는 하부구조 건물로 만들어졌다. 구조물은 일반 원형 극장과 별다른 것이 없지만, 입구부터 그 시대 귀족과 평민이 사용하는 문이 구별되어 있고, 관객석 역시 다르게 구별되어 있다. 높은 무대 건물은 대부분의 다른 극장과는 달리 관중석과 분리되어 있다. 무대 건물은 셀주크 시대에 대무역상들을 위한 숙소로도 사용되었는데, 끊임없이 복구한 덕분에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복구하여, 그후 야외 공연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맨 위쪽 관중석에 올라 보니 아래쪽에서 하는 보통의 말소리가 위쪽까지 명료하게 들리는 것을 보며 당시의 건축술이 대단했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런 곳에서라면 노래를 한번 멋지게 불러보고 싶다는 음악 교사의 말을 남겨두고 발길을 돌렸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도시의 언덕에 올라 이 곳 일대를 구경하며 아고라, 불레테리온, 예배당, 기념 분수가 있는 윗 부분인 아크로폴리스와 극장과 스타디움 , 로마 목욕탕과 수로 등이 있는 아랫 부분을 함께 관광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극장만을 보게 된 것이 유감이다.

메블라나 교단의 발상지 콘야

이곳에서부터의 일정은 콘야를 경유하여 카파도키아(네브세히르)로 이동하는 것이다. 버스로 6시간 정도의 긴 시간을 달려야 한다. 우선 콘야로 가기 위해서는 경치가 아름다운 토로스 산맥과 아나톨리아 내륙을 관통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긴 시간이었지만 차창 밖으로 바위들과 푸른 나무숲이 연출하는 기기묘묘한 모습들, 그리고 그 산자락에 형성된 터키의 농촌 마을들을 구경했다. 그 동안 사람이 남긴 수많은 유적과 유물을 감상했다면, 지금 우리는 오묘한 자연의 모습과 그 뒤에 담긴 위대한 섭리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꽤 많은 시간을 달려와 잠시의 휴식을 위하여 휴게소에 들렀다. 멀리 버티고 선 우람한 바위산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 곳에서 먹은 복숭아 맛은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할 만큼 꿀맛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또 얼마를 달려 콘야에 도착했다.
콘야는 수도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250㎞ 떨어진 곳이다. 기원전 2세기에 로마인에 의해 이코니움이란 이름으로 건설되어, 이제는 2백만이 넘는 대도시로 앙카라에 이어 중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콘야는 아나토리아 셀주크의 수도였으므로 셀주크 초기의 터키-이스람 건축물로 가득차 있었고, 예술과 정치, 학문 등 문화적인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콘야에는 이스람 시아파의 한 부류인 메블라나 교단의 사원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스람 사원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신비주의의 하나인 메블라나 교단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져 있어, 메블라나사원에서 원무(圓舞)의 한 형태인 더비시(dervish) 춤판이 벌어지는 12월에는 그것을 보기 위해 밀려드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을 정도로 유명세를 치르는 곳이다. 13세기 중앙아시아 발흐(지금의 아프간 북부)에서 태어난 메블라나는 득도를 위해서는 출가해 코란을 육신의 눈으로가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읽고 궁극적으로 알라 신과의 만남을 추구할 것을 주창했다. 메블라나 하면 떠올리게 되는 더비시 댄스는 그러한 목적에서 태어난 것이다.
콘야에 도착하여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이곳 음식점도 터키식 전문 뷔페식당이었다. 메뉴 중에서 터키의 전통 음식의 하나인 케밥(Kebap)이 인기를 끌었다. 양고기 또는 쇠고기를 쇠꼬챙이에 꿰어 세워 놓고 불에 구운 것으로 돌려가며 칼로 썰어 먹는 음식이다. 또 단 것을 좋아하는 터키인의 취향 때문인지 벌집도 얼마든지 훌륭한 메뉴로 올라 있었다.

콘야의 메블라나 박물관

점심을 먹고 알라딘 사원을 돌아본 후, 콘야에서 가장 중요한 메블라니 박물관을 찾았다. 이 박물관은 16세기에 술탄 셀림 2세 때 건축가 시난에 의하여 지어진 사원 옆에 있다. 메블라나 박물관은 아름다운 초록색 타일로 장식된 외부와 뾰족한 원추형의 모자와 같은 지붕이 매우 인상적이다.
6,500㎡의 넓은 부지 내에 메블라나의 사당과 사원, 수행장소 등이 늘어서 있다. 사당은 13세기에 만들어 졌고, 그 외의 것은 오스만 터키의 슐레이만 대제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메블라나 사후, 1924년까지는 메블라나 교단의 집회장으로 이용되었으나 1925년 아타투르크의 명령으로 수행장도 폐쇄되고 교단도 해산되었다. 그러다가 1927년 메블라나 사당만 박물관으로 공개되었다. 이런 일로 하여 아타투르크에 대한 콘야 시민들의 지지도는 다른 도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편이라고 한다.
휠링 더비쉬의 창시자인 메블라나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던 이 박물관은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휠링 더비쉬의 명성 때문에 일년에 백만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박물관은 관광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눈을 끄는 것은 단연 수도자들이 추는 더비시 춤판이었다. 원통형 모자, 하얀 윗도리, 둥근 치마, 남성 무용수, 침묵 속의 댄스로 요약되는 더비시는 춤추는 자를 황홀의 경지로 이끌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수련 방식은 신비주의젓 색채가 농후하다는 이유로 정통 이스람에서는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이스람은 알라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도록 할 뿐 개인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면 입구로 들어서면 단상 위에는 금박 수를 놓은 천으로 덮힌 관(棺)이 있는데, 맨 안쪽의 가장 크고 중후한 관이 메블라나의 관이다. 그 옆에는 그의 의복과 애용품과 신비한 악기들, 셀주크 시대와 오스만 시대의 공예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그가 쓴 시집과 코란의 사본, 친필 서적이 눈에 띈다. 중앙 유리관에는 마호메트의 턱수염을 넣은 조그만 상자가 있고, 별채에는 수행자들의 생활을 표현한 인형과 카페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메블라나 박물관은 터키 국내에서도 특별히 성스러운 곳이어서 여성은 관광객이라고 할지라도 스카프를 쓰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메블라나 박물관 관광을 마친 우리는 서둘러 다시 버스를 타고 카파도키아로 이동, 페리 타워(FERI TOWER)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 호텔은 카파도키아의 지형이 주는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건축한 독특한 형태의 건물이었다. 야간에 조명을 받은 모습은 환상적이면서도 다소 그로테스크하게 보였다.
터키탕 목욕은 식사 전후에 개인별로 알아서 하기로 했다. 흔히 한국에서는 '터키탕' 하면 퇴폐 업소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터키탕은 터키에 존재하지 않는다. 터키탕을 증기탕 정도로 보면 어떨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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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Beverly Hills (비버리 힐스 ) 2012.07.03 2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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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유니버셜 스튜디오 - Universal Studios Hollywood 2012.06.14 2259
196 걸작다큐멘터리 문자 - 1부 위대한 탄생. 2012.11.17 2243
195 Boston, Massachusetts 2012.12.11 2186
194 진안고원길 _ 바람 되어 걷는 하늘땅 영모정에서 네 개의 고개 넘어 원덕현까지 2012.07.19 2171
193 아프리카 식당 2013.10.25 2149
192 세계테마기행 - 태고의 신비 호주 태즈매니아( 2부) 2013.03.28 2138
191 이스라엘 - AHAVA 여행사 & 천지여행 2012.06.02 2132
190 창조과학탐사여행 10/27-11/3 (온누리교회) 2012.09.28 2121
189 경상남도 사천 실안노을길 _ 팔도의 길을 걷다 2012.07.21 2120
188 디즈니랜드 - Disneyland Park 2012.06.15 2119
187 세계테마기행 모로코 (2/4) 베르베르족의 전통을 찾아서 2012.10.11 2085
186 역사의 땅 이스라엘: 유대광야 2014.03.20 2074
185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 TASMANIA 1부 (호주편) 2013.03.28 2068
184 성지순례-14> 시험산 2012.10.21 2055
183 2012 봄 여름 유행헤어스타일 연예인 긴머리웨이브 + 짧은머리웨이브 모음샷 ♩ 2012.07.28 2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