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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남상학의 시솔길

<터키 여행기>(2)



역사와 문화의 보고(寶庫)

서양과 동양의 길목을 찾아서





제7일 : 8월 11일(주일) 카파도키아의 전일 관광



오늘은 터키 여행의 열흘째 되는 날로서 주일날이다. 짧은 일정에 많은 곳을 보고 싶어서 그 동안 하루에 여러 곳을 이동하였으나, 오늘은 카파도키아 전일(全日) 관광으로 일정이 짜여 있다. 다행이 오늘이 주일인데 그 당시 크리스찬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믿음을 지키며 살았던 곳을 둘러보게 되어 다행이었다.
카파도키아는 교회 역사상 진기한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이 곳에는 상상을 초월한 기이한 형태의 기독교 유적들이 남아 있어 찾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카파토키아란 지명은 카파도키아 왕국(기원전 257-64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부른 것인데, 지리적으로는 네브셰히르-카이세리-니데를 잇는 삼각 지대를 말하며, 터키의 중심 내륙지방의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이 카파토키아의 특징은 땅 속 여러 곳에 거대한 지하도시가 펼쳐져 있고, 천지 눈 닿는 곳마다 크림색 암석이 불쑥불쑥 솟아 있고 거기 수많은 동굴교회가 있다. 이 지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회색의 거대한 암석들은 구멍이 무수하게 나 있어 언뜻보면 유령의 도시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거대한 지하도시(地下都市)

거대한 지하도시는 데린쿠유와 카이막카르에 위치하고 있는데, 우리 일행은 관광객이 많이 몰릴 것을 대비해 서둘러 먼저 데린쿠유를 찾았다. 좁은 지하 통로를 이용하여 지하 도시를 둘러보는 일이 그리 쉽지 안기 때문이었다.
우리 일행이 서 있는 땅, 이 지하에 인위적으로 만든 20층의 거대한 도시가 존재한다는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우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무엇 때문에 이곳에 방대한 지하도시가 필요했을까?
이 지역 주민들은 AD 7세기부터 12세기까지 끊임없이 출정하는 군대들의 위협 하에 살아야 했고, 또 로마의 박해로 이 땅으로 피난하여 정착했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몸을 숨길 은신처가 절실히 필요했을 것이며, 그리고 이 지역의 지질이 그것을 가능케 하였다는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난 후 그제서야 의문이 풀렸다. 특히 초기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바위를 파서 동굴과 집을 만들었다.
이곳은 몇 차례의 화산의 폭발로 분출된 많은 양의 용암 재들이 지역 일대를 뒤덮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화산재들은 이질적인 석회로 변하여 오랜 동안의 풍화 작용, 침식 작용으로 저절로 자연 동굴이 형성되었고, 또 암석들이 단단하지 못하여 땅을 파기가 매우 쉬웠던 것이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데린쿠유에서 처음 지하도시가 발견된 것은 1960년대, 데린쿠유의 한 마을에서 닭이 조그만 구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주인이 당국에 신고한 것이 지하도시를 발견한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지하 120m까지 내려가는 대형 지하도시는 관광객의 안전을 위하여 현재는 8층까지만 공개하고 있었는데, 안내자를 따라 땅 속으로 난 좁은 통로를 들어선 일행은 지하로 혹은 옆으로 계속 파들어간 복잡한 미로(迷路)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겼다. 안내원의 도움 없이는 길을 찾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었고, 동굴 중간중간에는 외적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큰 맷돌모양의 둥근 돌을 막아놓았는데, 이 돌은 내부에서는 쉽게 열리지만 외부에서는 열려고 해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깥은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냉기가 지하 도시에 들어온 우리의 더위를 식혀 주었다.
지하도시의 동굴 내부에는 주거지로 사용하는 방을 비롯하여 식당, 부엌, 곡물 창고, 우물, 포도주 저장실, 동물 사육장, 지하 매장지, 교회, 신학교 등 완전한 도시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피난 생활이 장기화할 것에 대비하여 장차 교회 지도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신학교까지 설립한 것이라 한다. 이 지하도시에는 긴급 유사시 다른 지하도시로 피신할 수 있는 지하터널이 9㎞나 뚫려 있는데, 이런 지하도시가 36개 정도 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떠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로마 시대 크리스천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소아시아에 있는 이 지역으로 피난 온 이들이 용암재가 굳어진 약한 사암(砂巖)을 일일이 쪼아가며 파들어가 인공 동굴을 형성했으며, 피난민이 늘어날수록 더 큰 공간이 필요하게 되자 계속 그 규모를 넓혀간 것으로 추정된다.
주일 예배를 지하도시 내 신학교에서 드리기로 예정했었는데, 신학교에 도착한 것이 공교롭게도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꼭 맞춘 것처럼 11시 정각이었고, 우린 이 지하도시 신학교에서 감격적인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믿음의 선인들이 갖은 고초와 고난을 겪어야 했던 이 자리. 이 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다니,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다. 김봉현 목사님의 대표 기도와 서능재 목사님의 설교, 우리가 한 목소리로 부르는 찬송은 한 마디로 감동 그 자체였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구원을 주시는 복음을 위하여 갖은 고초를 겪었던 이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한없는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막 16:15)는 말씀을 되새기며 다시금 사명을 다지는 시간이 되었다.

기암괴석(奇巖怪石)의 동굴교회

데린쿠유에서 지하도시를 둘러본 우리는 곧바로 괴뢰뫼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4,000㎢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 전체가 잿빛 암석으로 덮여 있었다. 나무라고는 거의 보이지 않는, 황폐하고 황량한 지역에 넓게 펼쳐진 바위산, 그 바위산에 무수히 구멍이 뚫려 있는 기괴한 암석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마치 경연이라도 하듯 즐비하게 늘어선 원추형과 버섯모양의 돌기둥이 산재해 있는 모습들. 자연이 이루어 놓은 기적이라고나 할까? 자연이 이루어 놓은 모습들 앞에서 우리는 경이와 전율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카파도키아는 과거 화산 활동을 하던 에르지에스산과 하산산에서 수천만년 전에 용암과 화산재가 이 지역을 뒤덮게 되어 응회암(凝灰岩)이라는 암석으로 굳어졌고, 오랜 세월 계속된 풍화작용으로 달 표면과 비슷한 괴상한 모양의 대걸작품이 형성된 지역이다. 붉은 녹빛, 황토색, 밤색으로 된 암석은 으시시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 암석에는 언뜻 보면 아무도 사는 것 같이 보이지 않으나, 한때는 이 석굴 속에 100만 명 정도가 생활을 했다고 하며, 발견된 지하교회만도 1,000 개 정도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그 엄청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곳이 초기 기독교인들이 숨어 살면서 기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4세기경 성(聖) 바질이 이집트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하였는데, 이 때 시작된 수도원 운동이 카파도키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괴뢰메 계곡의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을 따라 10㎞가량 상류로 오르면 그 유명한 동굴교회 군(洞窟敎會群)과 만나게 된다. 좁은 계곡 양쪽의 절벽에 천연의 자연 조각품처럼 수많은 암굴이 뚫려있다. 이 암굴 속에 들어서면 지하 교회에서 우리는 신앙을 지키려고 박해를 피해 이곳 카파도키아로 이주해 와서 살던 모습들(부엌, 식당, 창고, 기타)과 기독교 자체 내에서 성화파들과 성화를 반대하는 이크노클라스파 간의 종파 싸움을 계기로 성화파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비잔틴 예술의 극치를 이루었던 성화들과 수많은 벽화들을 볼 수 있다.
이들 교회의 성화들은 이 지역에 이스람 세력이 들어오면서 손이 닿는 부분의 성화는 아예 없어졌거나 훼손된 것이 많으나, 토칼르교회 같은 곳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어두운 교회의 천장과 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애의 기적들, 최후의 만찬, 유다의 배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천정 모퉁이에는 성경 기록자들의 성화도 그려져 있다. 박해를 피해 이곳에 온 기독교도들이 비잔틴 예술의 극치를 이루었던 성화들을 이곳에 남겨 오늘날 살아 있는 기독교 박물관을 이룬 셈이다.
점심 식사를 위해 안내된 식당도 이곳에 인접해 있어서 우리는 마치 다른 유성에 착륙한 외계인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였다. 점심 후 둘러본 젤베와 주변 일대에 있는 돌기둥은 그 모습이 괴기하여 '요정의 굴뚝'이라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의 돌기둥은 아래가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지면서 꼭대기는 마치 모자를 씌워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깊은응회암 층 위에 용암이 흘러와 덮혀있다가 오랜 세월 풍화 작용과 침식으로 응회암은 깎이고 용암만 남아 마치 남근(男根)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앞으로 세월이 지나면서 산 언덕이 깎이면 계속 이 지역에 기괴한 모습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버스를 타고 달리면서 터키민요 '우스크달라' 노래를 흥겹게 부르며 계곡을 빠져나온 우리는 각종 터키 보석을 전시하고 있는 상점에 들러 구경을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정원에서 보는 초저녁 밤하늘에는 상현(上弦)달이 떠 있었다. 달이 활 시위 모양을 하고 있어서 과연 터키의 밤이라고 탄성을 지르는 우리에게 옆에 있던 식당 종업원이 그 달을 가리키며 '투르키예'라고 외친다. 듣던 대로 터키인들은 애국심이 강한 듯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오늘 여행한 장소를 시간대로 다시 간추려 보았다. 엄청난 박해 속에서도 종교적 신념을 굽히지 않은 기독교도들의 불굴의 삶, 그 자취를 더듬어 보는 내게 카파도키아의 여행은 아마도 큰 감동과 충격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제8일 : 8월 12일(월) - 문명의 요람, 이스탄블에서의 하루

오늘은 다시 이스탄블로 떠나는 날, 여태까지 전용버스로 이동한 것과는 달리 터키 국내항공을 이용하기로 되어 있다. 새벽 6시 공항에서 이륙하려면 적어도 한 시간 전쯤 공항에 도착해야 하므로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카파도키아 카이세리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호텔에서 싸준 음식으로 간이식사를 하는 동안 터키의 새벽 하늘을 날아 1시간 15분만에 이스탄블 공항에 도착했다. 날씨는 쾌청하다. 비행장 앞에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짐을 실은 우리는 세계 관광객들이 가장 가 보고 싶어하는 이스탄불, 숱한 문명이 피고 진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이스탄블의 관광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스탄블은 기원전 7세기경 메가리아인의 전설적인 장군 비자스가 비잔티움이라는 도시를 건설한 후에 330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일곱 개의 성과 그 안에 궁전, 성당 등 많은 건축물을 남겼고, 그후에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이 도시를 재건하면서 궁전, 모스크 등 다양한 건축물을 세웠다. 때문에 이스탄블 관광은 각 시대마다 남긴 그 많은 유적과 유물을 둘러보는 것이 초점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볼거리와 함께,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도시의 경관을 또한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린 이 매력적인 도시 이스탄블 관광을 히포드럼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스탄블 언덕 위의 히포드럼

이스탄블 구도시 언덕 위에 있는 비잔틴제국 시대 마차경기가 열렸던 로마 경기장 히포드럼,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도 이곳을 '말(馬의) 광장'이란 뜻의 아트 메이다느라고 불렀다. 당시 10만 명의 관객을 수요할 수 있었던 히포드럼의 최초의 건설은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레스의 통치 때 시작되었고, 100여년 후 콘스탄틴 대제 때 완성되었다.
이곳에 있던 각종 기둥 등 돌등은 그 후 블루 모스크의 건축 자재로 사용되어 과거의 웅대한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된 넓은 광장에 단지 3개의 기둥과 하나의 분수대만 남아 있다.
26m나 되는 화강석 오벨리스크는 본래 이집트의 투트모스 3세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카데쉬에서 히타이트 군대를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집트 나일강가에 있는 카르낙 신전에 세운 것인데, 비잔틴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집트에서 옮겨놓은 것이다. 탑 가까운데 있는 다른 기둥은 그리스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뱀 세 마리가 몸을 틀고 있는 구리로 된 키 작은 기둥이다. 이 기둥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의 대군을 무찌르고 병사들로부터 빼았은 방패를 녹여 만든 것이라 한다. 그 옆에는 비잔틴의 콘스탄티누스 7세 황제가 세운 비잔틴 첨탑이다. 또 분수대는 독일 황제 카이세르 빌헤름 2세가 오트만 왕조에 만들어 기증한 선물이다.
비잔틴 시대에는 히포드럼에서 이륜(二輪) 마차 경기가 있었는데, 이 경기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정파간에 응원팀이 달라 경기 결과는 정치에도 영향을 미칠만큼 정치색이 강한 경기였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도 말의 광장에서 벌어지는 군중 시위에 긴장하였다. 말의 광장에서 벌어지는 조그만 불화가 시위로 이어지고 막판에는 제국의 운명을 바꿔놓는 혁명으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히포드럼을 둘러보고 이곳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블루 모스크, 성 소피아 성당들을 잇달아 찾아본다고 한다.

여섯 개의 첨탑과 돔으로 된 블루 모스크


히포드럼을 둘러 본 우리는 먼저 블루 모스크로 향했다. 블루 모스크는 고대 히포드럼 옆에, 그리고 성 소피아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다.
흔히 블루 모스크라 불리는 이 사원의 정식 명칭은 '술탄 아흐메드 사원'으로 1609 - 1616년에 걸쳐 위대한 건축가 시난의 제자였던 메흐멧 아아에 의하여 지어졌다. 이 사원은 오스만 제국의 황제 아흐메드 1세의 기독교 문화에 대항하기 위한 야심으로 건축된 것으로서 그의 이름을 따서 '술탄 아흐메드 사원'으로 명명하였다.
그런데 이 사원 내부가 명암이 각각 다른 약 2만 1,000개에 달하는 99가지의 진한 청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서, 발음하기 어려운 술탄 아흐메드 사원으로 부르기보다는 파란 빛의 아름다움에 따라 흔히 '블루 모스크'라고 부르고 있다.
아흐메드 1세 황제는 비잔틴 제국의 성 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건축물을 지으려는 대망을 술탄 아흐메트 사원을 지어 실현시켰다. 이 사원은 소피아 성당을 모방 발전시켜 전통적인 오스만 건축 양식으로 지은 것인데, 6개의 미나렛(첨탑)을 가진 독특한 것으로 건축적인 아름다움 면에서는 성 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스람 성지인 메카의 사원과 맞먹을 만큼 웅장하여 오스만 투르크 시대의 대표적인, 아름답고 웅장한 이스람 사원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터키인들은 이스탄불의 상징을 성 소피아 성당으로 보지 않고 이 블루 모스크를 꼽는다.
이 블루 모스크는 돔으로 구성되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중앙의 큰 돔은 작은 네 개의 돔이 받치고 있다. 이 크고 작은 돔의 균형과 사원 양쪽에 쭉 뻗어 세워진 6개의 미나렛은 가히 장관이다. 기둥은 여섯 개인데, 본래 일곱 개인 대규모 사원을 지을 계획이었으나, 성지 메카와 같은 규모로 지을 수 없다는 반대 때문에 기둥 수를 하나 줄였다는 일화가 있다.
미나렛 개수는 모스크의 규모를 나타낸다.
높이 43m, 지름 23m의 돔으로 덮혀진 사원 내부는 260개의 착색 유리창을 통해 빛이 들어와 장관을 이루며, 석양에 강 건너 아시아 지구 공원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제일 아름답다고 하며, 매일 저녁 9시면 음향과 함께 조명쇼를 볼 수 있다.
사원의 뜰 가운데는 샤드르반이라는 분수대가 있고, 사원 옆에는 신자들이 기도 전에 손발을 씻는 수도 시설이 있다. 그리고 사원 옆에는 복합 부속 건물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신학교, 병원, 시장 목욕탕, 부엌들로서 이런 시설은 퀼리예라고 부른다. 그리고 술탄 아흐메드의 무덤이 있다.

지하 물 궁전 예레바탄사라이

성 소피아 맞은 편 교차로에 있는 지하 저수조(貯水槽)로서 그 규모가 하도 커서 흔히 지하 물 궁전이라고 부른다. 이 지하 저수조는 비잔틴 시대인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인 532년에 건설된 것으로 가로, 세로가 각각 70m, 140m이며, 336개의 기둥이 저수조를 지탱해 주고 있다. 이 기둥들은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운반해 왔다고 한다.
이 저수조는 비잔틴 제국이 적에게 포위 당하는 비상시에 사용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물은 이스탄블에서 20여㎞나 떨어진 초원지대에서 발렌스 황제에 의해 만들어진 수로를 통하여 물을 끌어 들여 궁전의 식수로 사용하였으며, 현재도 저수량이 무려 80,000㎡에 달한 다고 한다.
한여름 더위에 지친 심신으로 이 저수조에 들어서니 온몸을 감싸는 냉기로 갑자기 생기가 날 정도였다. 관람객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돌기둥 사이에 설치한 복도에는 조명이 설치되어 있는데, 저수조의 은은한 조명과 실내에 퍼지는 음악 소리는 저수조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꽤나 잘 어울린다.
저수조 한쪽 끝에는 메두사의 머리가 거꾸로 놓여 돌기둥의 초석이 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메두사는 원래 아름다운 소녀였으나 여신 아테네의 신전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정(情)을 통했다 하여 아테네 여신의 저주를 받아 무서운 괴물로 변하였다고 한다. 이 메두사가 노려본 사람은 뱀이 된다고 하여 정면으로 시선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얼굴을 일부러 거꾸로 놓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보스포러스 해협 크루즈

터키 여행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보스포러스 해협 크루즈이다. 이스탄블은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양분하는 보스포러스의 양쪽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그 경치와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그래서 이스탄블을 찾는 관광객은 도시의 역사에 못지 않게 자연의 아름다움에 또한 경탄을 보내는 곳이다. 여기에는 궁전, 성곽, 그리고 많은 오스만 시대의 저택들이 양안에 널려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길이는 31.7㎞이며, 가장 폭이 좁은 곳은 루멜리 히사르가 있는 지점으로 698m이고, 가장 넓은 곳은 흑해와 만나는 곳으로 3.4㎞이며, 평균 물의 흐름의 속도는 3.4㎞이다. 지중해를 거쳐 대양주로 나가려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배들은 이 보스포러스 해협을 꼭 거쳐야 하는 데, 이 해협은 몬트렉스 조약(1936)에 따라 터키의 통제를 받는 터키의 영해이다.
역사적으로 보스포러스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또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려는 원정부대가 꼭 거쳐야 할 장애물이었다. 이곳에 놓여진 최초의 다리는 기원전 4세기 시티안으로 군사 원정을 가던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의 명령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70만명의 다리우스 군사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배와 뗏목을 이어 붙여서 다리를 만든 것이다.
그 후 해상 무역이 발달하면서 이스탄블을 무역 중심지로 만든 보스포러스는 비잔틴 시대에 최초로 여름 궁전이 세워지면서 그 중요성을 더하기 시작하였다. 해안선을 따라 세워진 몇 개의 요새들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오스만은 이 도시를 점복하기 위해서는 보스포러스를 통제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정복 전에 아나돌루 요새와 유럽 지구 위치 좋은 곳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 황제가 4개월 만에 축조했다는 루멜리 성이 있다.
루멜리 성은 반대편 해안쪽에 바예지드 황제가 만들어 놓은 아나돌루 성과 마주보고 있다. 이 성은 보스포러스 해협의 양 구간의 가장 좁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루멜리 성은 오스만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는데 중요한 요새이며 전략기지였다. 도시를 정복한 오스만 황제들은 도시 중심에서 가까운 보스포러스 지역에 살았고, 계속하여 해안가에 별장과 정원, 궁전을 짓도록 했기 때문에 보스포러스 해안에는 보기에 좋은 집들이 즐비하다.
보스포러스 역사의 또 하나 전환점은 흑해와 다다렐스 해를 연결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두 개의 다리를 놓은 것이다. 제1 보스포러스 브릿지는 루멜리 성에서 시내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공화국 창건 50주년인 1973년에 개통되었는데 흔히 아타투르크 브릿지라고도 한다. 그리고 제2 보스포러스 브릿지가 루멜리 성 바로 옆에 1988년에 개통되었다. 이들 다리는 유럽과 아시아를 오고가는 엄청난 교통량을 소화하고 있으며, 다리 밑으로는 매년 5만척이 넘는 선박들(화물선, 대규모 탱커, 크루즈 선박들)이 운행하고 있다.
크루즈를 하다보면 보포러스 해안선을 따라 전통적인 터키 가옥, 목재 빌라의 별장들, 뛰어난 자연 경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작지만 아름다운 정원의 숲들, 카페, 찻집, 술집들과 여러 종류의 다양한 식당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경치를 구경하며 주말을 즐기려는 이스탄블 주민들과 여름철 관광객들로 혼잡을 이룬다.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에 속한 터키군들이 많이 불러 우리 나라에 퍼뜨렸던 '우스크달라 머나먼 곳 찾아왔더니∼' 하는 노래의 우스크달라는 바로 갈라타 다리 건너 호스만 트루크 시대의 터키 가옥들이 남아 있는 곳으로 매우 낭만적인 곳이기도 하다.
갈라타 다리 바로 옆 보가즈 하트 제3부두에서 우리를 태운 유람선은 보스포러스 해협의 물길을 가르며 3시간 동안 보스포러스만이 지니고 있는 자연 경관과 그 옛날 축조된 우람한 성들, 오고가는 각종 유람선, 해안 양쪽의 휴양 시설들을 둘러보며 보스포러스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비잔틴 최대의 걸작 성 소피아 성당

오전 관광을 끝내고 한국 식당 '한사랑 식당'에서 점심을 든 우리는 가죽제품 전문점에 들러 패션 모델들의 의상쇼를 관람한 뒤 비잔틴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성 소피아(Hagia Sopia) 성당으로 향했다.
성 소피아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수많은 유적들 가운데 으뜸이 되는 건축물로 세계 건축학상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서기 6세기 중엽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명으로 건축되었다. 교회가 건축된 이래로 제국의 멸망까지 약 800년 동안 새로운 건축 기술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성 소피아를 능가할 수 있는 어떤 건축물도 건축되지 못하였다. 이 건물이 완성되자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그 황홀한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탄성을 질렀다. "솔로몬왕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 솔로몬왕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능가했다는 자부심이었다. 과연 오스만 황제 아흐메드 1세가 성 소피아 성당을 보고 부러움과 시기심을 느껴 바로 이 성당 옆에 이 성당을 능가하는 이스람 사원 '술탄 아흐메드 사원'을 건축할 만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537년에 건축되어 이스탄블이 오스만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916년 간은 성당으로 그리스 정교의 총본산이었다. 그 후 1453년부터 1934년까지 481년 간은 이스람 사원으로 사용하면서 그리스 이름인 '아야 소피야(Aya Sofya)'로 불리게 되어, 기독교 세계에서는 이 건물을 성 소피아 성당으로 부르기도 하고 이스람 세계에서는 성 소피아 사원으로 부르기도 하나, 터키에서는 1934년 박물관으로 지정, 현재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황제 유스티아누스에 의해 532∼537년 간 건축되었으나 실은 이 이름으로 지어진 세 번째 건축물이다. 첫 번째, 두 번째 건물은 모두 반란으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어 이 반란을 평정한 유스티아누스 황제 1세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걸고 화재로 없어진 성당보다 더 크고 견고하게 성당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교회 건축을 위해 가장 좋은 건축 자재와 돌들이 나라 전역에서 운반되었고, 5년 간 100명의 기술자와 10,000명의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
성 소피아 성당은 돔으로 만들어진 건축물 중 백미(白眉)로 꼽힌다. 중앙 내부는 7,000㎡로 매우 넓으며, 비잔틴 석조 공예술을 보여주는 총 107개의 기둥이 있다. 중앙에 거대한 돔과 4개의 소형돔을 갖추고 있는데, 중앙의 큰 돔은 지상에서 56.69m이며 돔의 직경은 32.37m로 웅장하다. 이 성당은 기독교 3대 기둥의 하나인 동방 정교회의 수장인 대주교가 있는 곳으로, 비잔틴 제국의 기독교 신앙의 중심 역할을 하였으나, 지진, 화재 등으로 수난의 역사를 걸어오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점령했을 때 값진 성상과 성물이 대거 약탈되었다. 그 후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함락당하자 이스람교를 따르던 오스만 제국 밑에서 이 성당은 이스람교의 사원 모스크(Mosque)로 바뀌게 되었다. 대성당 꼭대기의 십자가는 이스람교의 초생달 표지로 대체되었고, 대성당 안에는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기도처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모자이크로 된 기독교 성화는 회칠로 덮여졌다. 그러나 성당의 아름다움에 압도된 메흐메드 2세 황제가 병사들에게 성당 건물은 파괴하지 말도록 명령함으로써 성당이 파괴되지 않은 것만도 큰 다행이었다. 이 성당의 외부에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 시난이 16세기에 4개의 미나렛(첨탑)을 세웠는데, 이것은 이스람 사원의 위용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라는 설(說)과 함께 성당의 중력을 지지할 목적에서라는 두 설이 있다.
이후 성당의 성당 복원 작업이 1930년대 미국인 학자에 의하여 시작되어 회칠로 덮여진 성화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아직도 그 작업은 진행 중에 있다. 우리가 방문하였을 때 복원을 위해 본당 돔을 향해 설치된 높은 작업대 꼭대기에서는 계속 쇠망치 소리가 나고 있었는데,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종교 분쟁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여 중앙 돔의 절반은 성화로 복원하고 절반은 지금 상태의 이스람 문양을 그대로 유지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수많은 벽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소피아 벽화의 백미는 남쪽 복도 계단 서쪽에 있는 중앙의 예수 그리스도, 왼쪽의 성모 마리아, 오른쪽 세례 요한의 모자이크이다. 이것도 회반죽으로 덮여 있던 것인데 복원 작업 끝에 세상에 부활한 것이다. 중앙 작은 돔에는 금은으로 장식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성모 마리아가 옥좌에 앉아 있고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얼굴은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황제의 문 바로 위에는 9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가 있는데, 가운데는 아기 예수가, 왼쪽 원안에는 성모 마리아가, 오른쪽 원안에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있고, 앞에는 비잔 제국의 황제였던 레오 6세가 무릎을 꿇고 있다. 그의 아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또 오른쪽 문 외벽 위에는 두 명의 황제와 아기 예수 모자이크가 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또 그 옆에는 성 소피아 성당을 지은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증정하는 모습이다.
지금 건물 내에는 초기 기독교의 성화와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뒤 회교 사원으로 사용하면서 설치한 회교적 종교 장식물이 공존되어 동과 서, 기독교와 이스람 문화의 접촉이라는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을 보게 된다. 권력의 흥망성쇠에 따른 역사의 무상함을 이 곳에서 실감하는 것이다.

오스만 황제의 톱카프 궁전

이스탄블의 명소 중 하나는 오스만 터키의 황제들이 살았던 톱카프 궁전이다.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고 터키에 공화정이 수립된 후(1923) 톱카프 궁전은 고스란히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톱카프 궁전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내려다 보는 언덕 위 골든 혼과 보스포러스, 다다넬스의 3면 바다가 만나는 성터에 위치하고 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 세운 오스만 제국 술탄의 첫 번째 궁전으로, 15세기에서 19세기 마흐무드 2세 황제 때까지 약 380여년간 강대 권력을 휘두르며 대제국을 다스렸던 오스만 제국 황제의 궁전이 되었다. 톱은 대포(大砲)라는 뜻이고, 카프는 문(門)이라는 뜻이다. 궁전 입구 양쪽에 두 대의 대포가 배치되어 있는데 궁전 이름은 여기에 연유한다.
고전적인 오스만풍의 건축 양식을 가진 이 궁전은 중국 북경의 자금성의 구조와 흡사하다. 톱카프 궁전은 오스만 제국의 국사를 의론하고 결정하는 최고 기관으로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다. 입구 정면에는 아랍어로 된 "알라여, 이 궁전을 지은 사람의 영광이 영원하도록 하소서. 알라여, 그의 힘을 더욱 강하게 하소서"라고 새긴 글이 있다.
궁전 입구의 황제(皇帝)의 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 마당이 있는데 이곳에는 오스만 황제와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라 불리는 근위대가 위치하였는데 지금은 왕실 마차들이 전시되어 있다. 두 번째 경의(敬意)의 문을 지나면 또 다시 넓은 마당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는 동시에 각종 의식을 열었던 건물과 왕실 주방 건물이 있다. 이 주방은 하루 천 명 이상의 부엌 종사원이 매일 5,000명의 식사를 준비했다고 한다. 이 거대한 홀은 현재 극동과 중국의 도자기들을 전시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전시장 중의 하나가 되었다. 또 과거에 창고로 사용되었던 좁은 건물은 현재 은제품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세 번째 지복(至福)의 문은 황제와 황제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이 곳 마당에서 황제의 즉위식이 열렸으며, 이곳 접견실에서 술탄은 외국의 사신들과 장관들을 영접했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금남(禁男)의 구역으로 유명한 하렘이 있는데 하렘 건물에는 약 250여 개의 방이 있고, 황제가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비밀통로도 만들어졌다.
궁 내부는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이 소장했던 각종 보석과 보물을 전시한 보석관이 있는데 그 규모가 세계 최대라고 한다. 과연 오스만 황제들의 영화와 사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곳에는 각국에서 술탄에게 보내온 각종 보물을 비롯하여 도자기, 식기, 옷 장신구, 무기 등이 전시되어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세계 최대의 에메랄드, 86캐럴의 다이아몬드, 이스람교의 창시자 마호멧의 치아와 수염, 그리고 그가 입었던 망토, 메카의 신전 열쇠, 사도 요한의 두개골과 손, 다윗의 칼, 요셉의 모자와 모세의 지팡이 등이 있어 관람객의 발을 멈추게 하였다.
마지막 네 번째 맞이하는 정원에는 바그다드와 레반을 점령하고 기념으로 지은 바그다드 정자와 레반 정자가 있고, 후계자들의 할례 때 사용되던 방들이 정원의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발코니에서 골든 혼, 갈라타 타워와 갈라타 지역, 그리고 이스탄블의 고대 도시의 장엄한 경치를 볼 수 있다. 톱카프 궁전의 해안쪽 끝은 규율을 어긴 하렘의 여인들을 무거운 자루에 넣어 보스포러스 해협에 던졌다는 곳이다.

터키 최고(最古)의 시장 그랜드 바자르


이스탄블에 온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밀폐된 대형 실내 성곽시장인 그랜드 바자르를 방문하게 된다. 성곽 시장이라고 하는 이유는 시장의 모든 통로가 지붕으로 덮여 있어 마치 성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장은 15세기에 건축되었으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 아시아, 인도, 중국 등지의 각종 산물이 이곳에 집결되어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그랜드 바자르는 지금까지 12번의 강한 지진과 9번의 대화재로 파괴, 소실되었지만 그 때마다 더 크게 복구되었으며, 현재의 모습은 1954년의 대화재 이후에 새로이 복구된 것이다.
시장 내부는 60여 개의 통로에 5,000여 개의 상점이 있고, 15,000여 명의 상인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장에는 7개의 분수와 하나의 우물, 커다란 하나의 사원과 12개의 작은 사원이 있다. 과거에는 상인들이 머무는 숙소 '한'이 21개나 있었다고 한다. 또 학교와 목욕탕이 있었는데 1894년의 지진 후 복구할 때 철폐되었다고 한다.
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모두 18개인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누루오스마니예 게이트와 베야즈트 게이트이며, 누루오스마니예 게이트의 박공머리에는 의장용 무기와 책, 그리고 깃발이 새겨져 있고, 베야즈트 게이트의 박공머리에는 "신은 상인들을 사랑한다"라는 글과 술탄 압듈하미트의 인장이 새겨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답게 골목길이 사방으로 퍼져 있으며, 규모가 하도 커서 처음 가는 외국인들은 길을 잃기가 십상이다.
바자르 안에는 한 마디로 없는 것이 없다. 그랜드 바자르의 중추가 되는 베데스텐이라 불리는 보석이나 귀금속을 파는 상점으로부터 카페트, 피혁 제품, 의류 제품, 각종 골동품과 공예품, 각종 향료들이 즐비하다. 19세기 중반까지 이 시장은 노예 시장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물건을 사는 재미도 즐겁지만 쌓아놓은 갖 가지 상품들과 세계에서 몰려온 여행객들을 구경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만약 물건을 사기로 한다면 세계 도처에서 모여드는 외국 관광객들을 상대하므로 당연히 물건값을 정가보다 높게 부른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밤의 여흥 벨리 댄스

오늘 새벽 이스탄블로 오는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일찍 기상하여 하루 종일 숨가쁘게 이스탄불 관광을 하느라 다소 지친 몸이었지만 호텔에 도착하여 버스에 싣고 온 여행 가방과 그랜드 바자르에서 산 물건들을 호텡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간단히 샤워를 끝낸 다음 다시 버스에 올랐다. 내일 저녁에 이스탄블을 떠나게 되어 있으므로 이스탄블의 마지막 밤을 그대로 지낼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터키 여행의 추억을 만들 겸 이스탄블의 밤을 뜻깊게 보내기 우하여 찾아간 곳은 벨리 댄스 관람을 겸하여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대형 유흥 식당이었다. 밸리 댄스는 관광객이 많은 유흥 식당에서 관광 프로그램의 하나로 내놓는 여흥 중의 하나이다.
대형 식당에는 넓은 무대가 있고, 무대를 향하여 마주보고 앉도록 배열된 식탁은 예약에 의하여 이미 지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지정된 좌석 앞자리에 앉았고, 다른 블럭에는 또 다른 외국인 관광객이 들어차기 시작하여 어느 새 1,000석이 넘는 좌석을 메우고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파묵칼레 호텔에서 벨리 댄스를 잠시 보긴 했으나, 전문 유흥 식당에 안고 보니 한껏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 음식이 배식되고 두 서너 가지의 터키 민속무용을 차례대로 공연하였다. 화려한 의상과 템포가 빠른 음악에 따라 흥겨운 율동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 다음 머리, 가슴, 엉덩이에 반짝거리는 장식품을 달고 배꼽을 내놓은 채 허리를 흔들며 늘씬한 무희가 나타났다. 벨리 댄스였다.
벨리 댄스는 이스람 문화권 여성들이 추는 일종의 배꼽춤이다. 몸매가 아름다운 여성이 추는 섹시한 춤으로 기본 행위의 의미는 사랑을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미모의 젊은 여인이 하얀 살을 내놓고 배꼽을 퉁기며 선정적인 몸동작으로 격렬하게 몸을 흔들어 대는 벨리 댄스는 관광객의 마음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벨리 댄스라는 이름은 1890년 시카고에서 열린 컬럼비아 박람회를 통해 미국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프랑스인들이 이 춤을 배춤이란 뜻의 'dans du ventre'로 부른 것이 벨리 댄스(belly dance)라는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가슴을 드러내고 선정적으로 추는 벨리 댄스를 놓고 터키 내에서 찬반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이스람은 여성이 섹시한 옷이나 부정한 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몸을 드러내면서 추는 선정적인 춤은 이스람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벨리 댄스는 터키를 찾는 관광객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여흥이고, 관광 수입을 올리는 효자 상품이라며 옹호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이 덕분에 우리는 터키 여행의 마지막 밤을 흥겨움 속에 미모의 무희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제9일 : 8월 13일(화) - 이스탄블을 떠나던 날

오늘은 터키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오후 5시 15분 이스탄블을 출발하게 되어 있어서 어제 둘러보지 못하고 남겨둔 곳을 가 보기로 하였다. 날씨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쾌청하였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끝낸 우리는 웬만한 패키지 상품으로는 방문할 수 없다는 돌마바흐체 궁전을 찾아갔다.

호사스러운 왕궁 돌마바흐체 궁전

19세기 중엽 오스만 황제들은 톱카프 궁전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중전을 또 다시 지었다. 이것이 돌미바흐체 궁전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보스포러스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오스만이 이스탄블을 점령할 때 해군이 닻을 내린 포구로서, 돌마바흐체 궁전은 '정원으로 가득 찬 곳'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왕궁 중의 하나이다.
본래 이곳은 1611∼1614년에 술탄 아흐메드 1세의 명령으로 포구를 메우고 '베쉬타쉬 궁전'이라는 커다란 정원을 가진 목재 건물을 세웠다. 그 후 화재로 완전 전소되면서 쓸모없게 되자, 오스만 제국의 31대 술탄 압둘메지드 황제가 바로 이 자리에 유럽식의 호화 궁전을 짓기로 마음먹고, 아르메니아 건축가인 카라바트 발얀에게 명하여 1843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856년에 완공하였다. 이 시기는 오스만 제국의 국운이 기우는 터라, 그는 오직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회복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국가 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궁전의 건축에 매달렸다. 이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하여 지었는데, 오스만 건축 방식에는 없는 아름다운 정원을 조성함으로써 유럽풍의 분위기라는 인상을 주었다.
궁전 정문 앞에는 의장 사병이 집총(執銃)을 한 채 서 있어서, 관람객으로 하여금 보통 궁전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서 보니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서 있는 모습이 틀림없이 동상 같았다. 하도 신기해서 만져보고 나서야 동상이 아니라 실제 군인이라는 사실을 알 정도였다. 어떤 상황이 와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것이 신기하기만 해서 그 옆에 서서 기념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사진을 찍을 때도 부동의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전체 면적이 25만㎡(약 8만 3천평) 건평은 1만 4천 6백㎡, 연건평 6만 4천㎡로 3개층에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6개의 발코니, 6개의 목욕탕, 그리고 1,427개의 창문을 갖고 있는 거대한 궁전이다. 내부 장식으로는 시계 156개, 화병 280개, 촛대 58개, 131개의 커다란 카페트와 99개의 작은 카펫이 4천 5백㎡에 깔려 있다. 이들 카페트는 모두 수공으로써 왕실 작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궁전의 장식에는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을 정도로 실내 장식은 웅대하고 매우 화려하다. 4.5톤의 초대형 샹들리에가 36m 높이의 돔에 달려 있는 연회장, 280개의 화병, 156개의 시계, 58개의 크리스탈 촛대, 36개의 샹들리에, 고급 가구, 카페트, 커튼들이 궁전의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내고 있었다. 가구들은 파리에서, 화병들은 세브르에서, 실크 카페트는 헤레케와 리용에서, 크리스탈은 프랑스의 바카라트 크리스탈이며, 영국에서 가져온 촛대들은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것이다. 건축과 비품 마련에 엄청난 재정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또 궁전 안에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포함하여 오스만 역사의 말기를 보여주는 귀한 그림도 많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규모와 그 치장만 보더라도 이 궁전이 얼마나 웅대하고 화려한 것임을 짐작케 하였다. 한 마디로 세계의 궁전 증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을 만큼 사치의 극을 이루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관람하는 동안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최후 6명의 술탄과 압둘메지드가 15년간 거주했는데, 외국 원수의 주요 영접 장소였던 이 궁전을 다녀간 근세 지도자는 독일의 빌헤름 2세, 영국의 에드워드 8세, 페르샤왕 레나팔레비, 이락의 파이잘, 나폴레옹 3세 등이 있다.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가 이스탄블에 왔을 때에는 이 궁전에서 거주했다. 오스만 제국의 붕괴 이래로 이 궁전은 간헐적으로 32년 간 비어 있었으나 공화국 수립 후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즐겨 머물기도 했는데, 특히 아타투르크가 오랫동안의 투병 끝인 1938년 11월 10일 이 곳에서 사망한 후 궁전은 새로이 복구되어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오직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가 재정의 고갈 속에 추진된 돌마바흐체 궁전 건축이 막대한 건축비로 왕실 재정을 더욱 악화시켜 제국의 멸망을 촉진시킨 결과가 되었다니. 보스포러스 해변가에 위치한 돌마바흐체 궁전 정원을 걸어 나오며 우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미 역사 속에 사라지고, 다만 화려한 돌마바흐체 궁전만 남아 오늘날 세계 관광객들이 찾는 박물관이 된 것이다.

알렉산더 석관이 있는 고고학 박물관

돌마바흐체 궁전을 둘러본 우리는 이스탄블 고고학 박물관으로 향했다. 고고학 박물관은 톱카프 궁전 옆에 있었는데, 돌마바흐체 궁전을 보고 온 우리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외부에서 볼 때 그 규모도 작았으며, 관리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아 돌마바흐체 궁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또 방문객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내부에 진열되어 있는 유물은 만만치 않았다. 이 박물관은 주 박물관인 고고학 박물관 외에도 타일·도자기 박물관과 고대 동양 박물관 등 세 개의 박물관이 함께 있는 복합형 박물관이었는데, 터키 전체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250만의 유물 중 80만여 점이 이 이스탄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니 쉽게 보아 넘길 정도가 아니었다. 현재 전시 중인 유물들은 주로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것들로 십분의 일에 해당한다는 것이며, 약 8만에 가까운 설형문자 점토판은 영국의 대영 박물관 다음으로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고고학 박물관에는 로마, 비잔틴 시대의 석관, 묘석, 흉상 및 동상 조각품 등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으며, 고대 동양 박물관에는 이스람 이전 아랍반도의 유물과 이집트, 메소포다미아, 아나톨리아 지역의 발굴품들만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이스탄블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石棺)이었다. 이것은 1887년 시리아의 시돈에 있는 가족묘에서 발굴한 것인데, 오스만 제국의 고고학자 오스만 함디 베이가 이스탄블로 가져왔다고 한다. 석관의 규모가 클뿐아니라 석관 주위에 새겨진 조각이 너무 정교하여 완벽한 예술품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 석관 바로 옆에 있는 네 면에는 열여덟 명의 여인이 각각 다른 표정과 자세로 대왕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실적인지 금방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다. 이곳에는 또 그리스, 로마, 비잔틴, 오스만 시대의 동전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고대 동양 박물관의 걸작품으로는 기원전 13세기 중반 고대 이집트와 히타이트 간에 체결된 평화 협정문이 새겨진 설형문자 점토판과 기원전 14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사자 조각품이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다. 또 타일 박물관은 주로 터키-이스람 타일 및 세라믹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터키 여행을 마치며

18월 5일 서울을 떠난 우리 일행은 8월 14일 저녁 5시 15분 터키 항공(TK90편)으로 이스탄블을 떠나 15일 새벽 9시 5분 서울 공항에 도착하면서 끝이 났다.
우리는 여기서 터키 여행의 성과를 잠시 되돌아 보았다. 우리가 방문한 터키는 말로 듣던 대로 지리적으로 서양과 동양의 길목에 위치하여 '역사와 문화의 보고(寶庫)'라는 점에 공감할 수 있었다. 수많은 문명이 피고 진 세계사의 중원(中原), 고대 인류 문명의 요람(搖籃)인 아나톨리아 반도국, 청동기 시대 이전은 그만두더라도 히타이트를 시작으로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동 로마와 오스만 제국이 거친 땅, 그래서 그 땅에는 여전히 그리스 신화가 살아 있고, 그리고 곳곳에는 많이 파괴된 것이 크게 흠이지만 기독교의 성지(聖地)가 남아 있었다. 새로운 제국이 들어서도 이전의 문명을 파손하지 않는 미덕을 발휘한 덕택에 모든 문명이 제각각 빛을 발하며 뒤섞여 있는 곳, 그래서 전 국토가 '야외 박물관'이라 할만큼 나라 안에 유적과 유물들로 가득차 있음을 직접 눈으로 보고 대할 수 있었다.
지금은 국토의 97%는 아시아 있고, 3%만 유럽에 있으면서도 유럽으로 취급되기를 원하는 유럽 지향(志向) 탓으로 터키는 분명 유럽옷을 걸친 아시아라고나 할까? 그래서 어쩌면 유럽이나 아시아로부터 이단자(?)로 취급되는 듯한 나라. 또 전 국민의 99%가 이스람을 신봉하고 있지만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여 운영한다는 소위 세속주의(世俗主義)를 추구하기 때문에 이스람 국가로 불려지지 않는 나라. 약 200여개의 프로팀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국의 이을용 선수를 스카웃 할만큼 축구에 열광하며, 월드컵을 계기로 더욱 한국에 애정을 쏟고 있는 나라 등등. 다만, 우리가 어려울 때 피를 흘리며 도와 준 형제의 나라 천혜(天惠)의 땅 터키에 이제 다시는 지진(地震)의 참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나마 역사의 현장을 직접 둘러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부듯했다. 여기에는 동행한 두 목사님(서능재, 김봉현)의 도움이 무척 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44명의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배려하는 자세로 여행을 멋지게 이루어 낸 전체 구성원들의 마음씨에 감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여행을 준비하고 추진한 숭의여고 국어과 교사연수단에게 특별히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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