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85
yesterday:
139
Total:
993,422



꿈·여행·사랑. 혈관의 아드레날린을 펄떡펄떡 뛰게 만드는 세 가지 단어다. 이 단어를 듣고도 무덤덤하다면 그는 이미 늙었다. 아무리 나이가 젊다고 해도 그렇다.

열정이 있는 사람을 분별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가방이다. 며칠 전이었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교에서 복도를 지나다 한 여학생과 마주쳤다. 그녀는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소지품이 와르르 쏟아져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물건 줍는 것을 도와주다 색다른 것을 보게 되었다. 연필로 쓰고 지우다가 몇 번이고 고쳐 쓴 노래 가사와 곡이었다. 치열한 내적 전투의 생생한 흔적이었다.

그녀는 실용음악과 학생이었다.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작품인 듯 당황해 했다. 인사와 함께 총총히 사라지는 그 학생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흐뭇했다. 그녀는 언제일지 모르는 전성기, K-POP의 주인공이 될 날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완성이 안 된 그녀의 작품은 분명 꿈을 실현시켜줄 마법의 도구가 될 것이다.

노트와 수첩은 정신적 결사체

나는 대학교 강의와는 별도로 저녁 시간에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일명 ‘파스텔’이라는 파워 스토리텔링 강좌를 이끌고 있다. 강연을 끝내면 지친 목을 달래기 위해 가끔 근처 카페로 가는데 그날은 적지 않은 수강생들이 나를 따라왔다. 생맥주를 나누며 자연스레 트랜스 미디어 시대, 글과 말 그리고 이미지가 섞인 융합 스토리텔링으로 화제가 옮겨지자 여성 수강생 몇 명이 가방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아날로그 식 노트였다. 몰스킨 같은 브랜드 수첩도 있었지만 이름 없는 국산 공책도 있었다. 그들은 수첩의 빈 공간 위에 그림을 그리고 뭔가 글을 적어 놓고 있었다. 디지털 문명과 함께 죽어가던 종이 수첩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흐와 피카소, 헤밍웨이가 즐겨 사용했다는 전설의 수첩 몰스킨을 극적으로 살려낸 것은 극성스런 마니아들이었다. 몰스킨은 이제 할리 데이비슨과 어깨를 겨루는 가장 충성도가 높은 브랜드가 되어서 연간 1000만 권 이상이 팔린다고 할 정도다. 디지털 시대라지만 어떤 아날로그 제품은 오히려 시장이 더 늘어났다. 하긴 꿈을 표현하는데 디지털이면 어떻고 아날로그면 또 어떤가. 그들에게 노트와 수첩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정신적 결사체인 것이다.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플랫폼’이라는 몰스킨의 모토처럼 말이다.

흥미로웠던 것은 한 젊은 남성의 소지품이었다. 개인 비용으로 참가하는 문화강좌에 가보면 압도적으로 여자 수강생이 높은데 놀란다. 술집에서 남자들이 호연지기를 뿜어내고 있을 때 여성들은 열심히 자기개발을 한다. 그런 점에서 그 남성 수강생은 예외였다. IT회사에 근무하기 때문에 업무용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다니지만, 동시에 편지지를 항상 가방 안에 넣어 다닌다고 했다.

아날로그면 어떻고 디지털이면 어떤가

편지지? 의외였다. 지금은 편지를 잃어버린 세대가 아니던가. 커피를 마시다가, 또 누구를 기다리는 동안, 문득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어지면 그 자리에서 편지를 쓴다고 했다. 어느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를 앞에 두고 만년필로 글을 쓰고 있을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림을 그리건 편지를 보내건 모두 남모를 꿈을 꾸고 있다는 의미다. 또 다른 피카소, 헤밍웨이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자 수강생 가운데 가장 연장자가 조심스레 말을 이어받았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60대가 아닐까 싶었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강의실에 도착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과제를 해내는 분이다.

“사실 몇 번이고 고민했습니다. 이 나이에 젊은이들에 섞여 뭔가 배운다는 게 어색해서 올까말까 망설였어요. 아, 그런데 지금 너무 행복해요. 뭔가 다시 배운다는 것 말이죠. 정말 잘한 결정입니다. 하하하!”

또래의 다른 이들이 골프가방 아니면 등산용 배낭이 전부일 때 그는 공부 가방을 챙겨서 강남에서 강북까지 달려왔다. 큼직한 옛 공책 위에 손 글씨를 써내려가는 그의 모습은 멋이 있었다. 무엇인가에 몰입한 얼굴은 흡사 쾌활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냥 얻어지는 2막 인생은 없다. 나는 중년들이 손가방에 영양제와 콜레스테롤 억제하는 약봉지만 넣어 다니지 말고 꿈도 함께 넣어 다녔으면 좋겠다. 나의 쾌활한 수강생처럼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방은 배움을 의미한다. 10대들의 백팩에는 무거운 입시용 책들로 가득하고, 20대의 가방에는 취업용 서적과 서류가 들어있다. 그러다가 직장에 들어가서 1~2년이 지나면 남자들의 손에서는 갑자기 가방이 사라진다. 손에서 가방이 떠나는 것과 함께 배움도 뚝 끊어진다.

평생교육 시대다. 제 2의 인생에 안착하는 비결은 새로운 몰입 대상을 빨리 확보하는 거다. 미술 작가들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감수성은 더욱 섬세해진다고 한다. 게다가 미술은 근본적으로 육체운동을 수반하기에 건강에도 좋다고 권유한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한편 슬픈 일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 평소 꿈꿔왔던 일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는 요즘 30년 모아두었던 자료를 다시 뒤져 책 쓰는 작업하느라 흥분되어 있다. 내 손길이 닿기만을 기다리며 목을 길게 빼고 있는 자료들에게 더 이상 미안해 하지 않아서 좋다.

He Story보다는 I Story에 더 공감


나는 나이를 ‘나의 이야기’의 준말이라고 다르게 정의하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들려줄 나만의 이야기가 풍요로워진다는 뜻이다. 흔히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열권’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그렇지 않다. 구슬도 꿰매야 보석이니까. 우리는 모두 가슴 속에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직 쓰여 지지 않은 책이다. 이제 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때다. 뒷담화하고 살기에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남의 이야기인 히스토리(He Story)보다는 아이 스토리(I Story)에 사람들은 더 공감하는 법이다.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빈 공간을 마주하는 것은 두렵다. 동시에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우선 필요한 부문만을 뽑아서 초록으로 담아도 충분하다. 글을 쓰든 스케치를 하던 그것은 자유다. 소중한 내 인생의 이야기를 담아보는 거다. 무에서 유로 창조자가 되는 연습을 해보자.

어떤가. 수퍼 시니어의 수퍼 스토리. 멋지지 않은가.

손관승 세한대 교수(전 iMBC 대표)

http://joongang.joins.com/article/172/17764172.html?ctg=1000&cloc=joongang|home|newslist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