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거룩하신 임재가 풍성한 그러한 공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기만 해도, 그 사랑의 물결을 느낄 수 있는 곳..

영이 부드럽게 풀리며 경배가 주님께로 올라가며, 감동과 행복감이 넘치는 그러한 공간..

 

항상 예배에 주님의 임재와 영광이 나타나는 곳..

과거 시내산에서 호렙산에서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에서 임하셨던

그 영광의 불길을 약간이라도 경험할 수 있는 곳..

 

그러한 임재의 공간이, 도처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것은 이 나라의 운명을 바꿀 것입니다.

 

그 거룩한 공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충만한 생명을 얻으며

이 나라를 지배하는 모든 악한 영들, 세력들을 깨뜨릴 힘을 얻게 될 것이니까요.

 

우리는 그러한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들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다니는 교회가, 또한 우리 가정이 그러한 장소가 되어야 하겠지요.

이를 위한 몇 가지 방법들에 대하여 나누려고 합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원이나 교회를 인도하는 사역자의 사역철학이겠지요.

그는 주님의 살아있는 생생한 임재에 대한 사모함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어떠한 공간은

그 공간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의 영적 상태와 가장 관계가 있으니까요.

 

그는 자신이 예배를 인도하는 그 공간에

주님이 임하시고 역사하시는 비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 공간에 들어오기만 하면, 영이 열리고 주님의 은총에 사로잡히게 되는

그러한 교회를 세우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러한 경험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몇 가지의 조언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1. 첫째로, 예배가 드려지는 공간은, 예배를 거스르는 일체의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조금 전에 나는, 예배를 드리는 곳에서

TV로 축구중계를 보면서 응원을 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험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그러한 원리는 몹시 중요합니다.

 

어떠한 공간에서의 행위는, 그 공간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릴 때도

평소에 그 공간에서 축구를 할 때의 소리, 함성, 흥분..

이러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주님이 아닌 다른 것,

즉 축구와 승부에 흥분하고 있을 때, 주님이 임재하시기가 어려우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 각자가 ‘교회’이고,

교회당은 건물에 불과하지만, (지성소는 휘장이 찢어져 사라졌지만, 구약 율법의 형식은 폐지되었지만 )

구약시대 때부터, 성소를 ‘구별’한 그 정신만큼은,

신약시대에도, 계속 유지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공간(예배실)에서의, 그러한 인간적 흥분과 긴장은, 영의 역사를 소멸합니다.

무지로 인하여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이에 대한 반성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상 숭배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영은 너무나 거룩하고 깊고 섬세하신 영이며

그런 일을 통하여 상처를 받으시고 소멸됩니다.

 

예배 실에서 탁구대를 놓고, 예배가 끝나면 탁구를 치는 곳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물론 좋은 것입니다.

예배실이 아닌, 교제실에서는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주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예배를 드리는 공간에서는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물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여

예배와 기도 가운데 주님이 오시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그 곳에서 축구를 보든, 영화를 보든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실제적인 임재를 기다리는 곳이라면

그 곳을 거룩하게 기름 붓고 보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소(지성소 포함) 개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만,

최소한으로 구별해야 할 필요는 있는 것입니다.

 

 

가정교회, 처소교회, 개척교회와 같이 작은 공간에서는

예배실을 식사하고 교제하는 장소로 많이 사용합니다.

 

교제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리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화의 내용은 아주 중요합니다.

 

주님과 말씀과 상관이 없는 세상의 영,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남을 험담하는 이야기..등은 주님의 임재를 소멸시킵니다.

 

그러므로 무슨 대화를 하든지, 주님의 임재 안에서 해야 합니다.

사역자는 성도들의 대화를 잘 관리해야 하며, 그것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 경험으로 보더라도, 일반 가정에서도 형편이 되어서,

기도실을 따로 떼놓는 가정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의 기도는, 다른 방보다는 더 잘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당에서의 기도, 특별히 새벽기도처에서의 기도는,

다른 건물보다는, 기도가 더욱 잘 되는 면도 있습니다.

그 장소가 ‘구별’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2. 둘째로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은 오직 주님을 높이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찬양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찬양은 청중들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하여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은 영계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수많은 천군 천사를 부르는 것입니다.

심령을 다하여 주를 높이고 찬송하면, 온 우주가 진동합니다.

그 공간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의 영광과 기름부음이 가득하게 됩니다.

 

※‘영적 굴뚝’이 막힌 가정이 있고, 확 뚫린 가정이 있습니다.

‘장소’도 장소이지만, 그 ‘영혼’ 개인적으로 볼 때도, 그런 차이는 있습니다.

 

늘 기도와 찬송이 울려 퍼지는 개인, 가정은.. ‘굴뚝’이 뚫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개인/ 그 가정의 기도와 찬송은, 더 잘 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영적 굴뚝’이 막혀버린 집도 있습니다.

너무 집에서,

기도도 소리 내어 하지 않고, 찬양도 소리 내어 부르지 않으면..

자기 혼자 하려고 애를 써도, 더 잘 안 되는 면이 있습니다.

 

이때는, 영적으로 트인 사람(구역식구)들을 초청해서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면 좋습니다.

혼자 뚫기는 힘들어도, 함께 찬송과 기도와 예배로.. 영적으로 막힌 것이 쉽게 뚫립니다.

 

▲3. 셋째로 주님께 대한 높임과 찬양의 고백과 함께

그 공간에 대한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이들에 대한 모든 것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지속적으로 입술로 소리내어  고백해야 합니다.

 

헌신의 고백은 이 우주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능력의 고백입니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내 생명은 주님의 소유이십니다.'

'이 가정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이 곳의 왕이십니다.'

 

 

이러한 고백은, 고백하는 자기와 그 공간의 주인을 결정(또는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공간은, 주님이 통치하십니다.

 

그러한 고백이 있는 곳에서 악한 영들은 역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그 고백을 되풀이해야 합니다.

 

그것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이유는

그러한 시인과 고백이 실제적인 영적 권능을

지속적으로 부어주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전투적인 땅 밟기가 아닌 순수한) 땅 밟기 기도의 중심도 그런 것입니다.

땅을 밟으면서 이 땅의 주인, 이곳의 주인이 마귀가 아니고 사람이 아니며

주님이신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을 통하여, 그 장소를 지배하는 영들은 슬피 울며 떠나가고

거룩한 주님의 임재와 영광이 그 곳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것은 너무나 거룩한 행위입니다.

물론 그러한 고백이 아무 데서나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술집이나 러브호텔 같은 악하고 더러운 장소는

그 곳에서 행해지는 악한 일들을 통하여

악한 영들에게 봉헌된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효과가 없습니다.

 

 

▲4. 넷째로 그 공간에 주님의 임재가 가득 임하는 공간이 되려면

기도와 찬양이 많이 쌓여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 공간에, 영적인 힘이 가득해지게 됩니다.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저주의 메시지 중에 많이 등장하는 말이

'이 땅이 황무하여 사람들이 거하지 않는 곳이 되리라' (렘26:9) 는 말입니다.

 

어떠한 장소에 사람이 왕래하지 않고 황폐하게 되는 것..

그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영혼입니다.

사람에게는 생명의 기운과 활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여럿 모이면 재미있고 활기가 넘치게 됩니다.

 

사람이 별로 없으면, 침체되고 활기가 떨어집니다.

모임에 사람들이 많이 오면, 서로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으면, 서로 다시는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자체로 어떤 영적인 (끄는, 함께 상승작용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기도가 쌓여져야 합니다.

찬송의 소리와 외침이 쌓여져야 합니다.

그것은 그 공간을 거룩하고 충만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하기만 하면

그것이 응답된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기도에는 분량이 있습니다.

 

운동 하루하고 보약 한번 먹는다고 힘센 장사가 되지 않는 것처럼

기도의 분량과 찬양의 분량이 쌓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쌓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공간이 교회라는 장소입니다.

 

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건물 교회가 아니며

우리 자신이 바로 교회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교회라는 특정한 건물에만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가정, 어떠한 공간에도 주님이 임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 건물도, 구별되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가 더욱 활발하기 위해서 입니다.

 

 

▲5. 다섯째로 내 영을, 발성기도로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주님을 모시고 그 자체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그 주님을 드러내고 표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영은 자유롭고 풍성해지며, 이 땅에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 주님의 표현은 무엇보다도 발성, 소리내는 것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발성기도, 소리 내는 기도는 그 공간을 영적인 힘으로 채웁니다.

 

또한 춤의 달란트를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나 예배에서 자주 춤을 추게 해야 합니다.     *시와 찬미의 노래와 경배의 춤

그러한 이들이 권능의 기름부음을 받게 되면 춤을 춤으로써

그 공간에 주님의 아름다운 임재는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사역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모든 이들의 춤이 다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집회에서 어떤 여자 분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데

어찌나 더러운 기운(영)이 많이 흘러나오는지.. 아주 고통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많은 청중들이 그것을 보고 박수를 치는 것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사역자는 그러한 영의 상태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춤은 사람들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고, 감동을 일으키며

주님의 임재와 사랑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육적인 춤은 정욕을 일으키며, 그것은 그 공간을 오히려 더럽게 합니다.

찬양과 성가대도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