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술 JTBC 사회 2부장

김준술
JTBC 사회 2부장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2월 취임사부터 ‘배려와 책임’을 말했다. “우리는 콩 한쪽도 나눠 먹고 살았다”며 공동 이익을 강조했다. 늦가을 감을 ‘까치밥’으로 남기는 전통도 얘기했다. 그런 정신이 “방향 잃은 자본주의 대안”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름뿐이었다. 국민을 향한 ‘무한 봉사’와 ‘책임’은 없었다. 풍성한 까치밥을 대신 챙긴 건 최순실씨였다. 그 대가로 박 대통령 직무는 정지됐다. 이제 파장은 ‘국정 균열’로 치닫고 있다. 대통령의 버티기가 길어질수록 국민이 불행해진다. 해명 논리는 궁색하다. 최씨의 ‘국정 관여 비율은 1%’뿐이라는 출처불명의 산수만 해도 그렇다. 1%가 아니라 0.1%라도 허용돼선 안될 일이다. 궤변을 동원하다 보니 ‘관여 자체’를 스스로 인정하는 논리적 모순에도 빠졌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그동안 900만 명 가까운 촛불 민심이 광장에 나섰다. 하지만 대통령의 정면 돌파 시도와 함께 ‘송구영신’이란 말도 쓸 수 없게 됐다. 시민들은 새해 전야에 ‘송박영신(送朴迎新)’이란 주제로 집회를 펼친다. 대통령 퇴진 없인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쉼 없는 경고다. 바통은 정유년(丁酉年)에도 어김없이 이어진다. 역시 청와대·헌법재판소 앞의 촛불이 예고돼 있다.

대통령과 동조자들이 ‘판세 뒤집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분노는 더욱 달아오를 수밖에 없다. 특히 신년은 ‘심판의 날’로 시작한다. 특검 수사, 헌재 탄핵심판이 줄지어 기다린다. 뒤이어 닥칠 대선 역시 ‘구체제’를 단죄하는 또 하나의 관문이 될 것이다. 대학교수들이 꼽은 올해의 한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였다. 촛불 민심의 힘과 존재 의미를 상기시키는 말이다. 직무정지된 박 대통령의 배는 ‘난파선’과 같다. 그런데도 거스를 수 없는 물결에 저항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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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경제를 살린다며 숱하게 강조한 대로 ‘골든타임’이란 게 있다. 경제도 그렇지만 세월호 참사 때 ‘골든타임’을 날려 버린 게 바로 대통령이었다. 퇴진에서도 상황은 비슷하게 돌아간다. 앞서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이 제시한 당론에 동의하면서 ‘퇴진 의사’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지금 탄핵 심판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퇴진 불가’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내년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30년을 맞는 해다. 최루탄과 지랄탄 공세를 뚫고서 세상은 조금씩 바뀌어 왔다. 하지만 속을 보면 ‘구시대 적폐’는 여전하다. 그걸 한번에 드러낸 게 바로 최순실 사건이다. 해가 바뀌면서 새로운 ‘국정 시스템’을 향한 열망도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해법 도출이 늦어질수록 나라는 더 크게 망가진다.

다시 취임사로 돌아가보자. 박 대통령은 “나라의 운명은 국민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올 들어 40%에서 4%로 고꾸라진 지지율과 1000만 돌파를 앞둔 촛불의 함성. ‘국민의 결정’은 이미 나와 있는 게 아니던가.


[출처: 중앙일보] [노트북을 열며] ‘송박영신’의 무서운 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