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역사

1863년 1월1일 링컨, 노예해방 선언

링컨 미국 대통령이 앤티담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기를 잡자 그 이튿날 1862년 9월22일 '노예해방 예비선언' 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1863년 1월1일 이후 부터 미국 연방정부에 대해 반란 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면 해방한다는 내용으로 이것은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의 여러 주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노예해방을 선언하겠다는 경고였다. 반란 상태에 있는 주에서 해방된 흑인은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계속 일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도 있었으며 흑인들의 연방 군대 입대를 허용하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결국 흑인이 북군 병력에 흡수하게 됨으로 북군이 더욱 강해지는 계기도 됐다. 예비선언 발표 후 자치주가 이에 응하지 않자, 링컨은 1863년 1월1일 흑인 노예 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선언은 북부인들에게는 명분없는 전쟁이었던 남북전쟁에 도덕적 명분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고 자유와 인권을 지키고자 했던 미국 독립전쟁 때 처럼 전쟁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은 미 연방 대통령으로서미 연방을 수호한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한 전쟁의 부수적인 산물이었고 인도적인 명분에서 출발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북부의 산업 자본가와 남부의 대지주 사이의 경제적 이해대립이 전쟁으로 폭발한 뒤에 그 의미를 찾아가게 되었다.

1959년 1월3일 알래스카, 미국의 49번째 주로 합병

1912년부터 미국의 준 주였던 알래스카가 1959년 1월3일 정식 주로 편입되면서 미국의 49번째 주가 됐다. 주 승격은 '알래스카 주법' 이 1911년에 의회에서 통과된 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명과 알래스카 주민들의 찬반투표를 거쳐 이뤄졌다. 알래스카의 역사를 살펴보면 1741년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에게 고용된 덴마크인 베링이 발견한 뒤 러시아 모피 상인이 서서히 이주해왔으며 18세기말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모피무역을 독점하고 싯카를 건설하면서 19세기 초에 번영을 누렸고 국제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냉장고가 발명되기 이전까지 미국 남부에서 필요로 했던 얼음까지도 거래가 되었고 값비싼 바다코끼리 상아와 해달 모피 등을 구하기 위해 러시아 상인들은 알래스카로 몰려들었다. 알래스카를 발전시켰던 유능한 상인 알렉산드르 바라노프가 현업에서 물러나면서 이후 알래스카는 러시아 해군에 의해 몰락의 길로 치달았다. 크림전쟁이발발하면서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방어해줄 수도 물자를 공급해줄 수도 없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에두아르트 스테클 워싱턴 주재 러시아 공사가 황제의 지시에 따라 윌리엄 수워드 미국 국무장관과 협상을 시작했고, 1867년 미국의 슈워드 국무장관이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구입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인들은 이 거래를 가장 어리석은 거래라고 하며 '슈워드의 어리석은 행위' 라고 부르기까지 했지만 금맥이 발견되고 풍부한 자원이 개발되면서 알래스카의 가치는 급 상승했다. 특히 미국이 한국 전쟁을 겪는 동안 알래스카에 매년 2억5천만 달러를 군수비로 쏟아부을 만큼 알래스카는 북방의 수호자가 되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서울 침입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서울에 침입했다.
북한군 정찰 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에 관한 작전 지시를 받은 124부대원 31명은 17일 임진강 고랑포 일대로 침투,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돌파했다. 19일에는 얼어있던 임진강을 건너 경기도 고양군 법원읍 삼봉산에도달했으며 20일 앵무봉을 통과하여 비봉, 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내려와 21일 세검정 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까지 도달했다. 이들은 전원 기관단총을 소지하고 1인당 실탄 300발, 권총1정, 대전차용 수류탄 2발과 대인 수류탄 10발로 무장한 후 국군 복장을 하고 있었다. 목표는 박정희 대통령 살해였고 이후 차량을 탈취하여 북으로 도주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자하문 초소의 검문에서 지프를 타고 올라온 종로경찰 서장 최규식 총경의 제지를 받았고 뒤따라온 버스를 지원 병력으로 오인, 최서장의 가슴에 총을 쏜 뒤 버스에 수류탄을 던지고 흩어져 달아났다. 31명의 북한 특수부대원의 뒤를 쫓은 군, 경 합동 수색대가 다음날 인왕산 기슭에서 김신조를 생포, 5명 사살, 그리고 이후 1월 31일까지 경기도 일대에 걸친 대대적인 수색작전 끝에 총 28명의 부대원을 사살했으며 2명은 북으로 도주한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이 종료되었다. 이 사건으로 우리 군은 국가 비상사태 시국가의 안전 보장을 위해 '을지연습'을 매년 실시하고 있으며 향토 예비군을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4년 1월 1일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 발족

북미 자유무역협정은 북미의 캐나다, 미국, 멕시코 3국이 관세와 무역 장벽을 없애고 자유 무역권을 형성한 것을 말한다. 1989년 미국과 캐나다간에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고 1992년 멕시코가 동참하면서 북미자유무역협정이 완성되었다. 이후 1994년 NAFTA 가 정식 발효되었다. NAFTA에 대한 협상은 1991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협정 체결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고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다. 1992년 미국과 캐나다 안에서는 자국내 제조업이 큰 타격을 입고 실업률이 증가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멕시코 역시 1차 산업이 붕괴되고 자국 경제가 미국에 종속될 거라는 우려가 대두됐다. NAFTA가 체결된 1994년에는 멕시코 원주민과 농민들을 중심으로 무장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이들 나라의 인구와 국내총생산 규모는 각각 3억6천만명과 6조달러로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블록 이었고, 지금도 세계 주요 경제 블록 중 하나다. NAFTA 는 무역 장벽 해소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 고용창출, 민주주의 강화를주요 목표로 삼았다. 1993년 1월~10월 미국 캐나다 멕시코의 3개국 간 무역량은 3026억 달러였지만 2013년 같은 기간에는 9509억 달러로 3배 가량 증가했다. NAFTA 체결 이후에는 비약적으로 수출이 증가했다. 특히 멕시코의 경우 1993년 519억 달러에서 2013년 3709억 달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블록화가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무역 적자가 1,810억 달러로 증가했고 1백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으며 멕시코로부터의 이민도 2배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