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플라워호(Mayflower)는 1620년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신대륙 아메리카 식민지, 현재의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에 ‘필그림 파더스’라고 불리는 ‘청교도’(프로테스탄트) 개척자들을 수송한, 유명한 영국의 선박이다. 당시 이 배의 승객 102명, 승무원은 25에서 30명이었다.
1527년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로 촉발된 교황과의 갈등은 1531년 2월 11일 영국 성직자들이 헨리 8세를 잉글랜드 교회에서의 왕위 지상권을 인정하는 결의를 함으로써 로마 가톨릭과는 결별의 길을 걷게 된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헨리 8세를 파문하자, 1533년 앤 볼린과 재혼을 했고, 1534년 왕위지상령을 공포하여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고,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삼았다. 로마와 결별 이후 종교개혁 운동이 영국으로 들어와 탄력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성상 파괴, 순례의 폐지, 성인숭배 폐지 등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영국 성공회는 개신교가 아니었으며, 헨리 8세가 신봉하는 믿음도 가톨릭 그 자체였다. 1539년 잉글랜드 교회의 6개 신조에서 영국 교회가 가톨릭 교회적인 성격을 유지함을 선언하고 있다.
영국 성공회가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에서 분리가 된 것은 1559년이다. 잉글랜드 의회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믿음의 옹호자"(에미리트)로 인식하여 왕위지상령을 채택하고, 반대로 개신교적인 법을 폐지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선택한 길은 "중도"(Via Media)라고 불리는 것으로, 잉글랜드에 혼재하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서로를 부정하고 배제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길을 택한 현실적인 정책이었다. 또한 여왕은 1563년 성직자 회의에서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앙고백》을 제정, 영국 성공회의 국내화를 강화했다.
이때부터 영국의 청교도와 영국성공회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1603년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영국 성공회에 강력한 지지를 보냈고, 또한 왕권신수설을 기리기 위해 국왕의 절대성을 주장했기 때문에, 개신교 여러 교파들로부터 반감을 사게되었지만, 한편 《흠정역 성경》의 출판을 지시하는 등 종교적인 공헌도 컸다.
1620년 청교도인 필그림 파더스는 결국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으로 향하게 된다.
1625년 즉위한 찰스 1세의 치세에서는 성공회가 스코틀랜드를 교화하려고 했기 때문에 반발하는 사람의 손에 의해 청교도 혁명이 발발하여, 패배한 찰스 1세는 1649년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후 왕정복고와 명예혁명을 거쳐, 오히려 성공회 주류의 지위는 강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