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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향 그윽한, ‘지리산 신선 둘레길’ _ 배두일 에세이

simbang.com(된장과고추장) 2012.07.21 23:33 Views : 1585

방방곡곡 면면촌촌, 둘레길이 없는 곳이 없지만 지리산 둘레길은 274km에 이르는 규모로 보나 주위의 풍광으로 보나 단연 둘레길의 으뜸이다. 사람들 발길이 끊일 줄 모르도록 인기 또한 높아서, 한번 가고 싶어도 앞뒤 행렬에 치일 것을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는 판이다.

그러나 요즘 같은 한여름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뙤약볕 내리쬐는 지리산 둘레길을 혼자 걷자면 누구라도 좋으니 말벗할 사람 하나 만났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을 것이다. 머릿속에 물 생각만 넘쳐 나는 무더위엔 다들 기를 쓰고 바다와 계곡으로 향하는 데다, 둘레길에는 금방 화상을 입힐 듯한 불볕에 무방비로 노출된 구간이 많기 때문이다. 5개 시•군, 20개 읍•면의 117개 마을을 이어 부드럽고 편안하기만 하던 고샅길과 논둑길이 웬만한 ‘둘레꾼’도 꽁지를 뺄 고생길로 변하는 것이다. 결국 북적거리는 인파도 싫고 뜨거운 햇볕은 더 싫고 하여 이것저것 가리다 보면, 어느 세월에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붉은 황토에 뿌리를 내려 적송이 되었을까. 미끈미끈하고 울울창창한 솔숲 사이를 걷기란 그야말로 신선놀음이다.

누가 그 같은 산꾼의 심정을 ‘어엿비’ 여겼을 리는 만무한데, 바로 엊그제 새로운 지리산 둘레길이 생겼다기에 소문나기 전에 얼른 가 보고서는 가슴 저리는 짜릿함에 몸을 떨었다. 지리산 둘레길의 첫걸음이 시작됐던 남원시 산내면의 매동마을과 붙어 있는 원천마을에서 바래봉을 향해 가지를 친 길이 새로운 ‘신선 둘레길’이다. 신라 구산선문의 천년 고찰이요, 가장 많은 국보와 보물을 간직한 실상사가 건너다보이는 곳에서 길은 시작된다.

들머리는 어디나 별다를 것 없이 포장된 마을길이어서 시큰둥하게 느낄 만도 한데, 그러다 놓치기 십상인 것이 천왕봉의 웅자이다. 일단 초입에 서면 뒤로 돌아서서 실상사 쪽을 바라다볼 일이다. 하늘 높이 지리산의 상상봉(上上峯)인 천왕봉이 제석봉과 중봉, 하봉을 거느리고 금대산 위로 솟아 호국사찰 실상사를 지켜보고 있다. 만약 무심코 몇 걸음 더 떼어 마을 뒤의 산자락으로 들어서고 나면 다시는 천왕봉의 웅자를 우러러볼 수 없다.

탱글탱글 사과와 호도가 벌써 여물어 가고 있는 밭 사이를 지나면 한소끔 고도를 높이는 가풀막인가 싶지만, 이내 거대한 버섯처럼 멋들어진 통나무 정자와 함께 둘레길 본색인 평탄한 흙길이 등장한다. 산허리를 이리 돌고 저리 도는 붉은 황톳길을 따라가다 보면, 도시에서 아스팔트 도로처럼 뻣뻣이 굳어 버린 마음도 금세 구불구불 엿가락처럼 휘고, 불그죽죽한 호박 속처럼 풀어진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몸을 틀며 하늘로 솟은 작은 고갯마루에 서자 소나무에 기대어 서 있는 허름한 산막(山幕)이 정겹다.

아무래도 소나무의 용틀임이 범상치 않게 보였다 했더니, 곰의 형상을 닮은 ‘곰솔’로서 길손들이 소원성취를 비는 소원목(所願木)이며, 고개 또한 곰이 하늘을 쳐다보고 누워 있는 형상의 ‘곰재’라고 한다. 아직 마음을 비우지 못해 가슴속에 이루고 싶은 소원이 솔잎처럼 무성하지만 딱 하나만 꺼내 산막에 얹고서 걸음을 옮긴다.

계속 이어지는 널찍하고 부드러운 ‘길맛’에 취해 걷다가 문득 햇살이 따가운 여름인데 하나도 덥지 않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제야 좌우를 둘러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선 둘레길의 풍채를 요모조모 훑어본다. 길바닥만 붉은 황토색인 줄 알았는데 상하좌우 사방이 죄 붉은색투성이가 아닌가. 황토를 빨아 올린 듯한 적송이 온통 빼곡한데, 서로 햇살을 다투느라 곁눈질할 틈이 없었는지, 다들 죽죽 미끈하게 하늘로 치솟아 도저히 높이를 가늠할 수 없다.

시원한 바람도 파고들 수 없을 만큼 울울창창한 송림이지만, 뜨거운 햇살 또한 미치지 못하니 더울 일이 없는 것이다. 아니, 쏴하고 하늘 위에서 솔바람 소리가 파도쳐 그 서늘함에 가슴에 오스스 소름이 끼친다.

영락없이 산속이 아니라 물속, 그것도 해저(海底)를 거니는 느낌이다. 본디 바다에만 물결이 있는 것이 아니요, 산에도 숲의 물결이 일렁이는 법이니, 신선 둘레길은 숲의 바닷속으로 난 길이라 해야겠다. 게다가 코끝에는 은은히 솔향이 감돌아 머릿속이 아득해지기까지 하여 ‘삶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단 하루라도 신선처럼 마음을 비우고 지리산의 넉넉한 품에 안기는 길’이란 신선 둘레길의 이름이 한갓 겉포장만은 아니것다.

목이 좀 마를 즈음 나타난 샘물은 천왕봉으로 가던 산신령이 이슬처럼 맑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세상에 대한 모든 탄식이 사라졌다는 ‘참샘’이다. 단 하루가 아니라 아예 해탈한 신선의 마음이 될 수 있다면야 누구라도 웅덩이를 바닥내고야 말지 않겠는가. 참샘보다 곧 이어서 나타난 ‘눈물고개’에서 발길이 더 오래 머무는 것은 아무래도 사람의 한살이는 예나 지금이나 간단치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돌연 앞이 탁 트이고 멀리 웅장하게 펼쳐지는 노고단, 반야봉, 삼도봉, 연하천 그리고 세걸산의 지리산 줄기에 감탄한 것도 잠깐이다. 6•25사변이 끝나고 풀뿌리로 연명하던 시절 가난과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화전(火田)을 일구어 감자, 고구마, 담배, 약초를 재배하여 지게로 져 나르던 눈물과 탄식의 고개라고 하는 사연이 눈길을 붙든다.

고개가 봄이면 산철쭉으로 뒤덮이는 바래봉에서 발원하여 일기일복(一起一伏) 하고 좌절우곡(左折右曲) 하여 굽이치는 능선이듯, 우리네 삶 또한 기복과 곡절로 사무치기 마련인 것이다. 산이 되어 가는 모습이 평안하기 그지없다. 무덤 앞에 절을 하도록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배계절(拜階節)을 어슬렁거리다가 ‘단 하루라도 신선처럼 지리산을 만끽’하란 말의 진짜 뜻은 따로 있는 것 같아 혼자 실소를 짓는다. 지리산 솔숲의 바다에서 솔향 맡으며 아무 생각 없이 거닐어 행복하고, 또 언제나 그렇게 지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신선 둘레길이 언뜻 보여 주는 풍경은 결코 하루 혹은 며칠의 즐길 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어우러져 하나의 길로 이어진 신선 둘레길에는 힘겨웠던 과거에서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우리 삶이 거쳐 왔고 앞으로도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 그 길이 가 닿고자 하는 바가 꿈과 같은 신선이겠으되, 이름 없는 민초로서 산으로 돌아가는 여정 또한 쉽지 않다. 그러니 단 하루라도 여기 신선 둘레길에서 마음을 비우고 새로운 힘을 충전하란 얘기가 아닌가.

신선 둘레길이 가 닿은 지리산 바래봉 턱밑의 심산유곡, 700m 고도에 있는 팔랑마을.요즘 보기 어려운 초가지붕에서 고향의 향수가 물씬하다.

물론 단순히 걷는 길로 따져 보더라도 신선 둘레길의 가치는 참으로 크겠다. 봄이면 팔랑마을을 거쳐 바래봉으로 산철쭉 구경 가는 길로 좋겠고, 한여름엔 뙤약볕을 피해 오솔길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더욱이 길바닥은 포근한 둘레길이면서도 마을 사이에 난 논둑길, 밭둑길이 아니라 산 밑에서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이어서 산꾼의 발길도 기쁘게 하겠다. 한마디로 둘레길과 산길의 좋은 점을 합쳐 놓은 딱 중간의 길이 신선 둘레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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