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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린도 후서 5.17-21)

옛날 중국의 노자(老子)의 스승 상창이 늙고 병들어 숨을 거두려고 할 때,
노자는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청하였더니, 스승이 입을 벌리고 물었습니다.
"내 입 속을 보거라. 혀가 있느냐?"
"네. 있습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이가 있느냐?"
나이 많은 스승 상창의 입에는 이가 하나도 없었기에 노자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물었습니다.
"이제 내 가르침을 알아듣겠느냐?"
그 때, 노자가 대답했습니다.
"이빨처럼 딱딱하고 강한 것은 먼저 없어지고,
혀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것은 오래 남는다는 가르침 아니신가요."
그 순간 스승 상창이 돌아누우며 말했답니다.
"천하의 일을 다 말하였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구나."
노자는 후에 도덕경에서 이런 깨달음을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로 적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최고의 선, 선중 선, 가장 최고의 계책은 물과 같이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은 흐르다가 산에 막히면 휘돌아서 갑니다.
갈 수 없으면
나아갈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립니다.
물은 결코 무리하지 않습니다.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어지고, 네모 그릇에 담기면 네모 모양이 됩니다.
끓이면 기체가 되고, 얼리면 고체가 되고,
흩뿌리면 먼지처럼 흩어지지만, 뭉치면 바다처럼 진중합니다.
그렇게 부드러우면서도, 물은 또한 결코 자기의 할 일을 잊지 않습니다.
항상 낮을 곳으로 흐르며, 항상 더러운 것을 씻고,
모든 지저분한 것들을 모두 자신이 품어 세상을 깨끗케 합니다.

얼마 전, 선배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60이 되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말씀 드렸더니,
‘내 경험으로 말하면, 목회는 60부터시작이야. 60이 지나니 이제 철이 드는 것 같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새기며
지난 목회 30여년을 돌아보았습니다.
젊은 시절 33살에 역사 있는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되었을 때,
여덟 분 장로님이 모두다 아버지 벌 되시는 어른들이었지만,
젊은 혈기로 얼마나 강하게 목회했는지 모릅니다.
이제야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때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목회했을까 후회가 되고,
그 때 내가 한 일들이 반드시 옳지만은
아니었다는
부끄러움도 있습니다.
그 때, 나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정확히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또 그렇게 따져야 한다고 확신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요즘 생각해 보면, 과연 신앙이나, 목회가 그렇게 두부 모 자르듯이 그렇게 정확히 잘라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판단력이 흐려진 것인지,
아니면 이제 비로소 철이 들어 융통성이 생기게 된 것인지 가끔은 혼동이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예전의 저는 지나치게 날카로웠고, 지나치게 자기 확신에 차서 남들을 내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했었다는 후회감입니다.
그 선배 목사님의 말씀처럼, 이제 60을 코앞에 두고 겨우 철이 드는가 봅니다.

며칠 전 오랜 만에 채근담의 한 구절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중에 상문역이지언 하고, 심중에 상유불심지사하면, 재시 진덕수행적지석이니,
약언언열이하고 사사쾌심이면 변파차생하여 매재짐독중의니라.
(耳中에 常聞逆耳之言 하고, 心中에 常有佛心之事하면, ?是 進德修行的砥石이니,
若言言悅耳하고 事事快心이면 便把此生하여 埋在?毒中矣니라.)
언제나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고, 마음에 언제나 어긋나는 일을 담으면,
이것이 곧 덕을 기르고 행실을 닦는 숫돌이 되리니,
만일 귀에 듣기 좋은 말만 듣고, 마음에 만족할 일만 두려한다면,
결국 자신의 삶을 짐독(짐새의 깃털에 있는 독)에 파묻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언제나 듣기 좋은 이야기만 들으려 하거나, 마음에 좋은 일만 두고 살려면,
오히려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것이 되고,
듣기 싫은 이야기도 잘 듣고, 기분 나쁜 일도 마음에 두며 살기를 노력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내 삶을 성숙시키는 좋은 도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지난 날 생각해 보면, 저는 목회하면서 좋은 말만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저 궂은일은 마음에 두고 싶지 않아, 일부러 멀리 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이들과 조화롭게 목회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남습니다.
공자님의 위정편에 나오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그 유명한 ‘열 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로 시작하는 말씀 중, 5~60세에 해당하는 말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오십이지천명 육십이이순(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오십에 천명을 알았고, 육십에 귀가 순해졌다.
육십에 귀가 순해졌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어느 한학자는 설명했습니다.
어떤 말을 들어도, 그 말이 다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황희 정승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종 둘이 와서 시비를 가려주시기를 요청하자, ‘네 말이 옳다.’ ‘네 말도 옳다.’하시자,
곁에 있던 부인께서 ‘아니, 이놈 말도 옳고, 저놈 말도 옳다면, 도대체 누구 말이 옳습니까?’ 묻자, ‘당신 말도 옳소.’ 하셨다 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
이제는 똑 부러지는 ‘정의’가 아니라, 모두를 품는 ‘사랑’이 그립습니다.
정의도 ‘사랑’으로 품어진 정의요, 목회도 ‘사랑’이 본이 되는 목회를 해야 합니다.
고린도 후서 5장의 ‘화목케 하라시는’ 주님의 명령이 이제야 깨달아지는 요즘,
그야말로 육십을 코앞에 두고야 이제 겨우 철이 드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