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3년 7월 14일
본문: 마태복음 6장 5-8절
설교: 김병삼 목사
제목: 이렇게 기도하여라! - 단순하게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
우리나라 사람들은 출신 지역이나 집안 족보에 따라서 어떤 특징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경상도 사람들은 성격이 급하고 서울 사람들은 깍쟁이들이다.'라든지, 혹은, 저는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 씨가 앉은 자리에는 풀도 안 난다.'라는 따위입니다.
물론 이런 말들은 그 지역 혹은 그 가문에 속한 각 개인에게 항상 틀림없이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속설들이 생기게 된 것은 어떤 특정 지역이나 집안에 속한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나 성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같은 환경이나 분위기 속에서 살다 보니까 어떤 공통적인 면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하여 일어날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해 주시는 말씀인데, 1절에 보면 "1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라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이스라엘"이란 예언서에서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듯이 바로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이어지는 본문에 보면 '유다 장막', '다윗의 집', '예루살렘 거민' 등의 다양한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유다라는 거주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 '다윗의 집안에 속한 사람', 혹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 - 이 모두는 어떤 특별한 혈연이나 지연에 속한 한 집단을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1절 하반절에 보면, 그런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을 선포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가리켜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라고 스스로 일컫고 계십니다.
즉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영하실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도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을 따라 주장하고 계시는 절대주권자이시라는 뜻입니다.
이하의 본문에 보면 그런 하나님께서 바로 당신의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심령을 두 가지 면에서 똑같게 되도록 조성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유다 장막', '다윗의 집', '예루살렘 거민'이란 오늘날 신약 시대에 있어서는 바로 '교회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신실한 신자들로 이루어진 참된 교회는 '같은 십자가 혈통'을 나누고 있을 뿐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속한 지체'들이 모여 있는 단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으고 계시는 '우주적 무형교회'는 실로 영적 혈연 및 영적 지연으로 똘똘 뭉쳐 있는 아주 특별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 결과 이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 역시 어떤 '공통적인 특징과 성격'을 보유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영적 공감대'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같은 '다윗 혈통'을 나누고 있는 영적 가족이며 똑같이 '예루살렘과 유다'라는 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성도들이라면 과연 어떤 마음을 공유하게 하고 계시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참된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믿음으로써 반드시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공유합니다.
본문 2절부터 9절에 기록하기를 "2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 3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4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아보고 모든 국민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5유다의 두목들이 심중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지라 6그 날에 내가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리라 7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8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9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과 유다는 자기네의 주변을 포위하고 공격해 오는 이방 민족들을 맞상대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유다를)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이나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이란 표현들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이방 민족들이 그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상 품고 있던 적대감과 살기를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항상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인간 사회의 핍박에 포위되어 있으며 불신 권력으로부터 박해를 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음을 뜻합니다.
교회와 세상 사이의 이런 영적 적대 관계, 즉 세상이 과학 지식이나 물질만능주의나 인본주의 사상으로써 교회를 에워싸고 공격하여 넘어뜨리려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인류 역사상 변함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사면초가에 빠져 있는 교회가 과연 어떻게 그런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열국과 그 국민'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오히려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단 한 가지 길,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주장하시는 구원 역사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데에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 사실을 여러 가지 말씀으로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2절에 보면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혼취케 하는 잔'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뜻합니다.
즉 그 불신 이방 나라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실 때 예루살렘이 바로 그 심판의 도구가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3절에 보면 그 예루살렘이 또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거운가 하니 "그것을 드는 자"가 오히려 "크게 상하게" 될 수밖에 없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천하만국"이 다 모여서 예루살렘을 함께 들어 내던지려 해도, 그것을 드는 순간 그 예루살렘의 무거움을 감당치 못하고 한꺼번에 손을 놓아 버리게 될 것이고 그 순간 그들의 발이 동시에 크게 다치게 될 수밖에 없는 장면입니다.
그 어떤 나라와 백성이든지 간에 감히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멸하기를 힘쓰실" 까닭에, 이스라엘의 승리는 100퍼센트 보장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주장하셔서 교회로 하여금 항상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과정에서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심령은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5절에 보면 "유다의 두목들이 심중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지라"고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베푸신 구원 역사'로 인하여 힘을 얻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의 침략에 대하여 승리하는 힘은 그 지도자나 백성 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유다의 두목'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함께 고백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7절과 8절의 말씀 역시 같은 맥락의 내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밝혔습니다.
유다 전체는 그 수도인 예루살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방어 상태가 약한 현실에 처해 있었습니다.
또 같은 유다인이라 할지라도 일반 평민들보다는 다윗 왕가에 속한 왕족들이 더 중요시 여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의 장군들은 전쟁이 발발할 때 아무래도 변방보다는 수도를 더욱 중히 여길 수밖에 없으며, 군대의 병력도 일반 국민들보다는 대통령을 위시한 주요 인사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더 많이 배치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전술에는 결코 그런 차별이 없습니다.
오히려 '유다 장막' 전체를 먼저 구원해 주심으로써, 다윗 왕가의 사람이나 예루살렘 거민들이 무슨 특별대우를 따로 받을 만한 "영광"스러운 존재가 아닌 것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유다'가 구원을 받게 되면 그 안에 있는 "예루살렘 거민"들 역시 자연히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살아남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8절 하반절의 말씀대로 "그 중에 약한 자가 그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게" 됩니다.
즉 일단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된 '유다 백성'이나 '예루살렘 거민'은 그 중에 아무도 '약한 자'가 있을 수 없으며 모두 다 '다윗 왕같이' 강하고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확신을 가지게 될 때에 그 '유다의 지도자'들은 마치 "나무 가운데 화로"같이, "곡식단 사이에 횃불"같이, 유다의 좌우를 에워싸고 있는 이방 세력을 순식간에 불살라 버리는 놀라운 승리의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 확신을 공유하게 될 때에 '예루살렘의 주민'들 역시 자기네들이 거주하고 있는 "그 본 곳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더 똘똘 뭉쳐지면서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는 성도들 사이에서는 원칙적으로 무슨 신분의 귀천이나 고하 따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직분들이 나뉘어져 있으며 같은 성도끼리라도 연령이나 성별에 따른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적어도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 이것 하나만을 두고 말할 때에는 목사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똑같은 존재'입니다.
바로 그런 구원의 확신이 있는 '다윗의 족속'은 그야말로 '하나님 같은' 즉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는 최상의 신분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 구원의 확신을 굳게 붙잡고 있는 성도들은 실로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같이' 각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친히 명령을 받는 종들, 똑같이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모시고 섬기는 '여호와의 사자'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피차 이런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될 때에 진정 서로를 존중하고 아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똑같이 구원해 주신 다른 성도를 내가 멸시하거나 차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구원의 확신을 공유하고 있는 성도들이 서로 격려하고 힘을 합할 때, 그 교회는 그야말로 그 어떤 시험이나 공격을 당해도 너끈히 이겨내는 필승의 공동체가 됩니다.
'지금 이 목양실 안에 나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있는 참된 동역자들이 있다.'라는 공감대로 탄탄하게 무장되어 있는 교역자들이 있을 때 어떤 마귀가 그런 교회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구 안에 나와 똑같이 천당구원을 확신하고 있는 심방장, 구역장들이 있다.'라는 이심전심이 서로 통하고 있을 때 그 어떤 불신 사회의 세력이 그런 신앙공동체의 결속력을 깨뜨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목사가 자신의 영력으로 교인들을 감화시키고 자기가 받은 은혜를 교인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생각한다면 곧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 택자들의 심령 속에 역사하시는 것을 의지하고 또한 체험하게 될 때에 목사는 그야말로 용기백배, 사기충천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인도 교회생활을 통해 어떤 육신적 도움을 기대하고 인간적 위로만을 바라고 있으면 끝까지 '약한 교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고 나면 그야말로 철저하게 '교회중심'으로 살아가는 '예루살렘 거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목사와 교인들이 뭉쳐지게 될 때 그 교회는 실로 세상이 건드릴 수도 없으며 함부로 도전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상하게 되는 '무거운 돌'과 같은 공동체, 좌우에 에워싼 불신 세력들을 오히려 놀라게 만들고 불살라 버리는 '화로와 횃불' 같은 무적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민인 '유다 장막'을 반드시 구원해 주시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는 힘'을 얻고 온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참된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회개하며 애통할 줄 아는 심령'을 공유합니다.
10절 이하 14절의 말씀에 "10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는 9절 이전까지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구원의 확신을 내려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그들에게 부어 주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곧 "애통"하는 심령, 즉 자신이 지은 죄를 생각하며 회개하는 심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0절 하반절은 더욱 놀라운 말씀을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 애통은 바로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그 '유다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장차 '그들 자신이 십자가에 달아 죽게 만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애통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라고 소리쳤던 유대인들 중에서도 일부는 나중에 이런 애통의 회개를 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십자가 사건에 직접 연관된 유대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참된 성도들은 이런 애통을 똑같이 겪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처럼 십자가에 달리시고 '찔리심'이 바로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며 그처럼 '상하심'이 바로 '우리의 죄악을 인함'인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도는 이처럼 예수님께서 바로 나의 죄 때문에 그토록 큰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실로 애통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자기의 죄를 두고 슬퍼하며 통곡할 줄 모르는 자에게는 그 죄를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참된 회개의 애통은 마치 "독자를 위하듯,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슬퍼하며 울 수밖에 없는 경우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자기 '독자'나 '장자'를 잃게 되었을 때의 통곡이야말로 그 최악일 것입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애통'이란 사람이 상상하거나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애통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곧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자기 평생을 통해 최고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애통이 나와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애통은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곳은 이스라엘의 덕망 높고 경건했던 요시야 왕이 전사한 장소였습니다.
그 요시야 왕을 지극히 아끼고 존경했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죽음 앞에서 모두 다 크게 애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세상의 그 누구와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지극히 훌륭하고 위대하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웠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은 그를 자신의 '왕 중의 왕'으로 모신 백성된 자라면 실로 가장 크게 애통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 애통은 각기 "따로" 하는 애통이라고 했습니다.
12절 이하 마지막 절까지에 보면 이 '따로'라는 말이 여러 차례 반복 강조됩니다.
그 애통은 각 "족속"들이 따로 하는 애통이었습니다.
"다윗 족속"과 "나단(다윗의 아들) 족속" 같은 왕족들 역시 각자가 따로 하는 애통이었습니다.
"레위 족속"과 "시므이(레위의 자손) 족속" 같은 제사장 족속들 역시 각자 따로 해야 할 애통이었습니다.
그 애통은 그처럼 지도자 된 위치에 있는 자들만 하는 애통이 아니라 "모든 남은 족속"들 역시 각자가 따로 해야만 할 애통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족속, 같은 집안이라 해도 남편과 "그 아내들이" 또한 "따로 하는" 애통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집'과 '예루살렘 거민' 각 사람들의 심령에 바로 이처럼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애통'과 그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흔히 '남자는 일생에 세 번 눈물을 흘린다.'는 말을 하지만, 사실은 남자나 여자나 딱 한 번은 반드시 흘려야만 할 눈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자신의 죄를 자복하면서 흘리는 '진짜 눈물'입니다.
참된 교회에 속한 참된 성도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바로 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똑같은 감정을 공유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애통은 성도 각자가 '따로' 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사가 주일예배 시간에 목회기도를 하면서 '사죄의 간구'를 올리는 것으로 대치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금요철야기도회나 새벽기도회 시간에 공적 기도제목을 두고 함께 나누는 '합심기도'로 때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대신할 수도 없고, 부모가 자식의 몫까지 도맡아 해 줄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참된 애통의 회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일대 일'로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애통' 속에 진정한 '은총'이 충만하게 됩니다.
자기 죄를 자복하며 '애통'하게 될 때에 자연히 그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간구하는 심령'이 따라오게 되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성도에게 어김없이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목사가 그 어떤 미사여구로 설교를 한다 해도 '예수 십자가 대속을 통한 사죄의 은총'보다 더 큰 은혜를 나누어 줄 수는 없습니다.
교인이 신앙생활을 통해 온갖 은혜로운 '간증거리'들이 아무리 많이 생긴다 해도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죄를 용서받게 된' 것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이란 결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못과 창에 '찔리신 그를 바라보며' 애통할 줄 모르는 교인들만 모여 있다면, 아무리 '사랑'이 넘치고 '기쁨'이 충만하며 '축복'의 체험들이 가득하다고 해도 실상은 진짜 '하나님의 은총'은 조금도 없는 교회입니다.
참된 교회 안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 예루살렘 거민'의 심령에 반드시 부어 주겠다고 하신 '회개의 눈물'과 '사죄의 기쁨'이 늘 철철 넘쳐흐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역자의 기도의 의존하지도 않고 다른 교인의 모습에 시험받지도 않고 오직 자신의 심령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대 일로 만나 그 대속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의 애통으로 통곡함으로써 교회생활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은총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택하신 백성들의 심령 속에만 이런 신기한 작용들이 일어나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구원의 확신'은 사람의 심령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실로 놀랍고도 강력한 현상입니다.
'회개의 애통'은 사람의 심령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제일 뜨겁고도 아름다운 반응입니다.
바로 이런 심령을 똑같이 소유하고 있는 성도들이 모임으로써 오늘도 참된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산성'으로, '가장 은혜로운 장막'으로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똑같은 '십자가 보혈'을 나누고 있는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반드시 이어받게 되는 영적 유전인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똑같은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그의 '양자'들이라면 꼭 나타나게 되어 있는 공통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똑같은 '그리스도의 왕국' 안에 속해 있는 '천국 시민권자'들이라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필연적으로 통하게 되어 있는 이심전심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는 이런 '영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택자를 반드시 구원해 주신다.'라는 확신 속에 '온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것 때문에 밖으로 늘 승리하는 '전투교회'가 됩니다.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들며 애통하는' 죄인만이 '성부께서 그 돌아온 탕자를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잔치'에 참예하게 됩니다.
교회는 바로 이것 때문에 안으로 늘 은혜가 충만한 '아버지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온 세계에 흩어져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장막' 안에 함께 거하며 같은 '예수 집안'에 속해 있는 참된 '교회 거민'이라면 반드시 똑같이 공유하게 되어 있는 이 '구원의 확신'과 '회개의 애통'을 자신의 심령에 늘 간직함으로써,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저 '하늘 장막'에 거하는 '천국 권속'에 영원히 속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