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더워도 걷는 것은 여행자의 숙명이다. 진정한 여행자는 여행지를 가리지 않듯, 일단 길을 떠났다면 길 위에 당당히 서야 한다. 보말죽 한 그릇에 든든해진 배짱과 길에서 만난 할머니가 준 보말 알갱이의 달콤함을 곱씹으며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해안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 요량이다.
| ▲ 마을은 포구 주위에 몰려 있고 총 60여 가구 중 사람이 거주하는 집은 30여 호라고 한다. | ⓒ 김종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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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는 동서남북의 길이가 서로 엇비슷한 850m 정도다. 섬 전체 모양은 거의 원형이지만, 서남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지형이 있어서 타원형에 가까워보인다. 섬 둘레는 3.6㎞ 정도로 섬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다행히 섬에는 차가 한 대도 없어, 그 흔한 경적도 매캐한 매연도 없다. 집들이 모두 포구 주위에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어 차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포구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다만 제주 본섬에서 일하러 왔다는 두 사내만이 정자에서 쉬고 있었다. 대개 정자는 나무로 마루를 깔게 마련인데 이곳은 돌로 만들었다. 물이 고이지 않는 소재로 제작한 일명 '숨 쉬는 돌'이었다. 2005년 제주 MBC에서 '아름다운 제주섬 가꾸기' 공익사업의 하나로 주민과 관광객들을 위해 쉼터를 마련했다고 한다.
| ▲ 드라마 <봄날> 촬영지 조형물(좌)와 고려 목종 5년인 1002년에 화산폭발로 만들어졌다는 비양도 형성 천년을 기념하여 2002년에 세운 기념비(우) | ⓒ 김종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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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천년기념비'가 눈에 띈다. 비를 살펴보니 2002년 7월 21일에 세웠다. 그 내력은 한자로 적혀 있었는데 대충 읽어보니 이러했다.
"고려 목종 5년(1002년) 6월에 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아 나왔는데, 산꼭대기에 네 개의 구멍이 뚫려 붉은 물이 솟다가 닷새 만에 그쳤다. 그 물이 엉키어 모두 기와돌이 되었다...(후략) "
이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인데 <고려사>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목종 10년에 조정에서 태학박사 전공지를 보내 그 사실을 알아보도록 했고, 전공지는 7일 밤낮동안 우레 소리가 계속되었다는 탐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직접 산 아래까지 가서 그 모양을 그려 바쳤다'고 적혀 있었다.
이처럼 제주도의 유인도 중 여섯 번째로 큰 비양도는 화산활동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목종 때의 화산활동으로 생긴 섬이 비양도가 아니라 가파도나 군산, 우도 등으로 추측하기도 하고, 비양도의 형성 시기를 1만년 이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비양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종 13년에 서씨 성을 가진 이가 처음 입주하면서였다. 조선 초기에는 죽순이 많이 나와서 '죽도'라 불렀다고도 한다. 이곳에는 특이한 지명이 많은데 종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다는 '종남머리', 만조 때 고기가 모여든다는 '조근원'과 '큰원', 원래는 작은 섬이었다가 비양도와 이어졌다는 '한삼다리', 고인물이 있다는 데서 생긴 '펄낭', 바닷새의 안식처인 '옷따는 여' 등이 있다.
섬 곳곳에는 모 방송사에서 방영된 드라마 <봄날>의 촬영지임을 알리고 있다. 고현정, 지진희, 조인성이 출연했다는데 여행자는 본 기억이 없어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이다.
| ▲ 바다 건너로 신창 해안의 풍차를 보며 걸었다. 불볕더위를 피할 그늘조차 없었다. | ⓒ 김종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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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구름 없는 맑은 날 바다에서는 우뚝 솟아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는 한라산을 상상하며 해안을 따라 걸었다. 고개는 자꾸 왼쪽으로 쏠린다. 풍경은 이미 협재해수욕장을 지나 신창의 풍차에 이르렀다. 섬과 섬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어선이 아니었다면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모든 것이 죽은 줄 알겠다.
얼마나 걸었을까. 섬을 여행하면서 이런 한심한 생각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검은 해안바위에 낚시꾼들이 뜨거운 오후를 낚고 있었다. 따가운 햇살을 피할 그늘 한 조각 없다. 평소 웬만해선 모자를 안 쓰는 데 오늘은 운 좋게도 모자를 챙겨왔다. 얼굴 깊숙이 모자를 눌렀다.
| ▲ 조금은 단조롭던 해안선에 코끼리바위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 ⓒ 김종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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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로운 해안선이 지겨울 즈음 눈앞에 작은 섬 같은 거대한 바위 하나가 나타났다. 여태까지의 자잘하고 검은 화산석과는 달리 초록색 옷을 입은 바위는 얼핏 보아도 예사롭지 않았다. 시선을 바위에 고정한 채 걸었다. 처음의 두리뭉실했던 바위는 어느새 코끼리 모양으로 변했다. 안내문에서 본 '큰가지바위'였다. 울릉도 코끼리바위(공암)의 축소판이라고 굳이 적어 놓아 피식 웃음이 났다. 꼭 거기에 빗댈 거는 무어냐. 싱겁기는...
그 흔한 차도 이 섬에는 없다. 그러다보니 해녀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은 보행보조차이다. 유모차와 비슷한 보조차는 해산물이나 갖은 물건들을 옮기기에 안성맞춤이다. 해안을 따라 걷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 ▲ 차가 없는 비양도에서 보행보조차는 해녀들이 해산물을 옮기거나 물건을 나르는 등 아주 쓸모 있는 운반도구이다 | ⓒ 김종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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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들의 숨비소리가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해안 주위로 서너 명이 물질을 하고 있었다. 갯바위에 납작 엎드려 무언가를 채취하고 있는 모습도 들어왔다. 마침 아주머니 두 분이 새참을 먹고 있었다. 여행자에게 떡을 권했다.
정중히 사양하고 잡은 거나 구경하자고 했더니 냉큼 보여준다. 성게와 청각 그리고 군소로 보이는 게 전부였다. 군소인 줄 알았던 것은 '군붓'이라고 했다.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군소와는 다르다고 고개를 저었다. 알 도리가 없었다.
6월부터 9월까지는 금어기. 물질을 하지 않는 대신 이렇게 갯바위에서 해산물을 채취한다고 했다. 금방 물질하는 해녀들을 봤다고 했더니 제철인 '청각'을 채취하는 거라고 했다. 지금 이곳 비양도에는 해녀가 15명 가량 된다고 한다. 그녀들은 다시 물건들을 챙기더니 갯가를 벗어났다.
| ▲ 작열하는 태양 아래 갯바위에서 잠시 휴식하고 있는 주민들, 군붓과 성게, 청각이 가득하다 | ⓒ 김종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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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양도에는 해녀가 15명가량 있는데 6월부터 9월까지는 금어기라 청각만 채취한다 | ⓒ 김종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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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길가 바위에 걸터앉아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의령이 고향인 서울에서 왔다는 어느 중년부부가 길을 물었다. 실은 길을 물은 게 아니라 다리가 좋지 않아 많이 걸을 수 없는 데 길은 시멘트요, 해는 뙤약볕이니 답답한 심정에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물은 것이다. 하필 이곳이 중간이라 돌아가도 절반이고, 앞으로 가도 절반이었다.
"제주도 온 지 일주일 되었는데, 삼일 뒤에는 다시 서울로 가지요. 참, 여행하기에는 여기만한 곳이 없는데 요즘처럼 덥고 습한 날에는 끈적끈적 한 것이 참 견디기 힘들어요. 아무래도 살기에는..."
택시 기사가 비양도를 소개해서 왔다는 아주머니. 경치는 그만인데 더위에 쪄죽겠다고 볼멘소리를 하더니 타박타박 앞서 걸어갔다.
| ▲ '애기 업은 돌' 등 비양도의 용암기종은 그 독특함을 인정 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 김종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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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오른쪽으로 수석들이 있었다. 잠시 눈길을 내어주다 해안으로 시선을 돌리니, 아주 특이한 지형이 나왔다. 말로만 듣던 '용암기종'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비양도 북쪽 해안은 그 규모와 산출 상태가 다른 지역과는 다른 매우 특이한 화산지형 중의 하나로 학술적 가치가 높아 2004년 천연기념물 제439호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그중에서 눈길을 끈 건 '애기 업은 돌'이었다. 어린 아기를 업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한 이 돌에 이야기 한 자락 없을쏘냐. 옛날 구좌읍에 살던 해녀들이 물질하러 왔다가 어쩌다보니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 해녀는 애기를 업은 채 남편이 데리러 와주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남편이 오지 않자 한라산 쪽을 바라보며 선 채로 돌이 되었다고 한다. '아기를 못 낳는 사람이 치성을 드리면 낳는다'고 전해지는 이 '애기 업은 돌(애기 밴 돌)'은 높이가 약 8m에 달한다. 이뿐만 아니라 주위에선 돌고래, 거북을 닮은 용암과 화산탄, 기암괴석들을 볼 수 있다.
| ▲ 불볕더위에 구름마저 없었다면... 구름 위를 산책하는 기분 이런 걸까! | ⓒ 김종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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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너머로 구름이 솟아올랐다. 아니 더위에 지친 나머지 길을 따라 구름이 내려왔다. 뭉게뭉게 피어난 구름을 보니 한결 시원해진 느낌이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이런 걸까? 섬 일주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비양봉을 중심으로 해안을 따라 난 길을 돌자 이내 펄랑못이 나타났다.
비양도 동남쪽 기슭에 있는 펄랑은 생각보다 제법 컸다. 이 작은 섬에 이런 규모의 저수지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펄랑은 바닥으로 바닷물이 스며들어 형성된 염습지다. 습지 안의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도록 나무다리 산책로가 놓여있다. 조수운동과 반대로 밀물에는 수위가 줄고 썰물에는 높아진다. 산책로 끝부분에는 비양도 사람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할망당이 있다. 습지 구석에 노란 꽃을 피운 황근이 보인다. 그 옆으로 협죽도가 힘겹게 피어있다.
| ▲ 비양봉 기슭의 펄랑못은 염습지로 작은 섬에 이런 큰 저수지가 있다는 게 놀랍다. 펄랑못가에 피어있는 황근과 협죽도 | ⓒ 김종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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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넓은 저수지가 있는데도, 비양도는 '물이 없는 섬'이었단다. 예전에는 빗물을 모아 식수로 사용했다가 1965년에야 협재에서 섬까지 해저로 수도관이 연결되었다. 갈대만 무성하고, 제대로 된 밭도 없었다.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면서도 인근 어장도 섬 건너 제주 서북해안 마을 어촌계가 전복 등을 채취하는 등 살아가는 게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저수지가 끝나자 마을이 나왔다. 섬을 한 바퀴 돈 것이다. 마을 끄트머리 가게에 들러 음료수 하나를 벌컥벌컥 마셨다. 비양봉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렸다. 다시 땡볕 속으로 걸어갈 힘이 없었다. 결국 비양봉은 다음에 오르기로 했다.
| ▲ 비양도를 떠나며... 배 시간은 여유가 있어 느긋하게 섬을 돌아볼 수 있다 | ⓒ 김종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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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카페에 들어와 책을 보았다.
"해발 141m인 비양봉은 2개의 분화구가 있다. 토질은 흔히 난을 키우는 화분에 담는 작은 돌알인 '송이'라는 화산재로 이루어져 있다. 비양봉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비양나무(제주도기념물 제48호)가 자생하고 있다."
비양도라는 이름과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중국 쪽에서 섬 하나가 떠내려 왔는데, 마침 밭일을 하던 한 아낙네가 '섬이 떠 다닌다!'고 소리치자 섬이 더 놀라서 한림 앞바다에 멈추었다는 이야기다.
섬을 도는 데는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비양봉을 올라도 배 시간까지는 느긋하다. 차도 없으니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다. 짧은 시간에 두 발로 직접 섬을 느끼기에 이만한 섬도 없다. 이번처럼 사람 잡는 더위만 아니라면….
☞ 비양도는 한림항 도선대합실(064-796-7522, 011-691-3929)에서 타야 한다. 배는 하루에 단 한 번, 아침 9시에 들어갔다 오후 3시 15분 배로 나와야 한다. 여름에는 12시에 중회 운영되기도 한다. 배삯은 어른 2000원, 어린이 1200원이다. 배로 15분이면 비양도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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