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22> 예루살렘
예루살렘, 첨예한 종교적 갈등의 현장
3대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스람교)의 성지
* 예루살렘의 상징, 성전산의 황금사원 *
예루살렘은 사해에서 서쪽으로 약 24㎞, 지중해안에서
동쪽으로 약 56㎞ 떨어진 이스라엘 중심부에 위치하며 지중해 연안 평야와 요르단 강에서 이어지는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세계 최대의 지구대) 사이
해발800m의 산악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란 뜻이다. 하지만 거룩한 땅과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갈등과 분쟁, 테러와 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예루살렘의 역사는 3000년 전 다윗의 시대로 올라간다. 기원전
약 1000년 경에 이스라엘의 선조 다윗왕이 구릉에 위치한 '시온의 성'이라 불리던 도시를 정복한 후 유대인들은 이 곳을 '다윗의 성'이라
불렀다.(사무엘하 5,7: 역대상11, 4-7: 왕상 8, 7). 아모스와 호세아를 제외한 모든 선지자들의 활동무대였으며 구약성서 대부분이
여기서 기록되었다.
이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에 중요한 뜻을 지니게 되었다. 다윗의 이름 밑에 유대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이
합병된 후, 예루살렘은 통일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사무엘 하 2, 4: 5, 3). 다윗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솔로몬왕은 도시에 왕궁과 성전 및
성채를 새로이 건설하고 성전 안에 언약궤를 보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 상 6-8).
그러나 이곳은 수많은 침략자들에
의해 다스리는 자들이 바뀌고 주민들은 쫓겨나는 등 질곡의 역사를 거쳐 왔다. 솔로몬이 세상을 떠나자(BC 933년) 이스라엘은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었고, 예루살렘은 남(南) 유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기원전 587년 신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에게 정복되어 유다 백성들은 바빌론에
억류되었다.
기원 전 538년 페르시아 왕 키루스 2세에게 석방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다. 기원 전
63년 폼페이우스의 로마 공화정에 점령되었다. 기원전 37년 헤롯대왕이 즉위와 동시에 성전을 개축하였다. 70년, 135년의 두 차례 봉기가
있은 후 로마는 전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고 '이방인의 도시'라 했다. 4세기에 로마가 기독교화 됨에 따라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638년 칼리프 오말에게 점령되었고 회회교의 중심지가 되어 이슬람 사원이 솔로몬의 성전 터에 세워졌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1187년 이집트 이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1260년 훌라구의 몽골군이 예루살렘 근방까지 육박했으나 바이바르스가 이들을 몰아냄으로써 맘루크 왕조의
성지 관할권이 확립되었다.
그 후 1516년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예루살렘을 접수하여 400년 내내 지배하였다. 크림 전쟁
중에는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 등의 성지 관리권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1차 대전 중인 1917년 영국에 점령되어 위임통치령으로 확정되고, 그
후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이민이 이루어졌다. 드디어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예루살렘은 동(東) 예루살렘(요르단)과 서(西)
예루살렘(이스라엘)로 분리되었다가 1967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전체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대립과 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거룩한 땅과 평화의 도시라고 말했지만 평화를 지켰던 때는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도 통곡의 벽 앞에서 수많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순례를 하고, 무슬림은 성전 산 위에 있는 '바위 사원'에서 알라에게 예배를 드린다. 언제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가
될 수 있을까? 현재 예루살렘은 성서상의 예루살렘 성(Old City)과 19세기 말 이후로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신시가지(New City)로 구분된다.
예루살렘 성은 서쪽과 남쪽으로는 힌놈의 골짜기로 내려가며, 동쪽은 기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올리브산과 갈라져 있다. 기드론 골짜기 상류에 왕들의 무덤이 있어 왕들의 무덤 골짜기로도 불린다. 구시가(Old City)를
둘러싸고 있는 예루살렘성의 웅장한 성벽과 성문은 오스만 터어키 제국의 슐레이만 대제가 예루살렘을 견고한 요새로 만들기 위해 1537년에서
1542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북쪽은 성벽이 먼저 완성되었고 뒤이어 동쪽과 서쪽벽이 쌓아졌다. 그리고 남쪽 성벽은 시온산을 포함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완성이 늦춰졌다. 성벽 둘레의 길이는 약 4,018km이다. 성벽을 따라 8개의 성문과 성위에 34개의 탑과 24개의 망루가 있다. 성문
중 욥바문, 다메섹문, 시온문은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성문들은 적의 침입시 방어하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나’자 형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색이다. 신시가지는 그 주변으로 예루살렘의 100배 크기로 계속 발전하고 있다.
특히 예루살렘은 예수의 사역, 죽음,
부활, 승천의 무대였다. 따라서 예루살렘 구도시의 경우 성서에 기록된 다양한 성지들이 자리하고 있어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구도시는 성벽 내의 도시로 유태인, 기독교, 회교,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이루어진 지역을 지칭하며, 여기엔 성전산, 예수님무덤교회, 통곡의
벽, 바위 사원, 성안나 교회, 다윗 성채, 가야바의 집터, 최후의 만찬기념 교회, 마리아 기념교회, 다윗왕의 무덤, 베드로 통곡기념 교회,
안토니아 성, 아르메니아 교회, 엘 악사 회교사원, 예루살렘 역사박물관 등이 있다. 물론 성밖에도 둘러보아야 할 곳이 많다. 구시가지에서
바깥쪽으로 형성되어 있는 예루살렘의 신시가지에는 주택지구, 상가와 관청, 여러 교육기관이 있다.
순례자들은 성서의 지명을 따라
오늘도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하지만 어느 곳도 엄밀히 말하면 예수의 흔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이 남긴 흔적이 아니라 로마가 만든
흔적이었다. 예루살렘을 기독교 성지로 만든 이는 콘스탄틴 황제였다. 그는 교회를 건축하면서 여기가 예수가 나신 곳, 가르치신 곳, 승천하신
곳으로 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건 아니다. 옛 예루살렘은 본래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성전 가운데 임재하던 곳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성지(聖地) 예루살렘이 오늘날 기독교 신자인 우리에게 타당한 구속사적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옛 예루살렘은 다가오는 새 예루살렘을 지시하는
예표로서만 우리들에게 의미를 지니는 것이어야 한다. 옛 예루살렘은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구약시대의 성전산 *
* 신약시대의 예루살렘 *
* 예루살렘의 다윗성, 예루살렘에서 가장 오래된 성전산 남쪽의 경사지인
오벨(Ophel)에 위치 *
*
예루살렘 성의 황금문, 7세기 비잔틴 시대의 구조물로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이
문을 통하여 입성하셨다 함 *
* 성으로 둘러싸인 성전산,
앞쪽은 기드론골짜기- '이 골짜기는 마지막 심판'이 일어나는 장소로 전해져 유대교도·무슬림·기독교인들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
* 예루살렘의 서쪽에서 남쪽에
걸쳐 있는 힌놈의 골짜기,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선 구실을 함
*
* 행정 관서 등 공공시설이 있는 예루살렘 신시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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