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완서 작가 맏딸 호원숙 작가
고 박완서·호원숙 작가 모녀의 산문집 출간

<아주 오래된 농담>을 쓰실 때에는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칠십 대에 들어선 나이에 300매에 가까운 1회 분량을 써내는 걸 바라보는 것도 고통이었는데 막상 나온 소설은 경쾌할 정도로 젊은 감각의 리듬으로 읽혔다.

글쓰는 노역을 바라보기도 안쓰러웠던 엄마와 첫사랑의 감미로운 감각을 함께 지닌 엄마, 그 거리감은 멀고도 가까웠다.

나는 엄마와 나 사이에 있는 그 거리감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거리감은 결국 고독감과 통하는 것이어서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이지만 그 고비를 넘기면 믿을 수 없는 편안함이 온다.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중


	[여성조선] "어머니는 흔들림 없는 작가였다"

구리 아천동에는 고 박완서 작가의 생가가 있다. 생전에 꽃을 매우 좋아한 작가이기에 소박한 마당도 딸려 있다. 지금 이 집에는 박완서 작가의 맏딸 호원숙 작가가 살고 있다. 마당에 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이면 작가는 어머니 생각이 더 많이 난다.

“어머니와 꽃을 가꾸는 것은 굉장히 오랜 습관이었어요. 아파트에 살 때도 베란다에 아프리칸 바이올렛 같은 꽃들을 항상 심으셨죠. 여기로 이사 와서는 어머니와 거의 같이 마당을 가꿨어요. 오늘 어머니의 지인 한 분이 찾아오셨는데 그분 말씀이 어머니가 항상 마당 자랑을 하셨대요. 우리 집에 꽃이 100가지가 넘는다면서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우셨대요.(웃음) 그래서 굉장히 큰 정원을 기대하셨는데 막상 와보니까.(웃음) 뭐, 대정원은 아니고 보통 마당이에요.”

글 쓰는 것만큼이나 마당의 꽃 가꾸기에 정성 어린 시간을 할애했던 고 박완서 작가가 올해로 타계 4주기를 맞았다. 얼마 전 박완서 작가의 데뷔 초 산문 전집이 출간됐다. 1977년부터 1990년까지 작가가 펴낸 산문집에서 중복되는 글은 추리고 현재의 맞춤법에 맞게 수정해 작가 특유의 입말을 가장 유사하게 살린 채로 7권의 책에 담겼다. 광주리장수부터 학교 선생님, 이웃집 젊은 부부, 구걸하는 거지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관심과 애정이 담기지 않은 소재와 대상이 없다. 마치 작가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처럼 생생하다. 비슷한 시기, 맏딸 호원숙 작가의 산문집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도 공개됐다. 그녀가 겪었고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박완서 작가를 들여다볼 수 있는 또 다른 창구다.

“어머니의 산문집은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1977)를 빼놓고는 전부 절판된 것들이기 때문에 지금은 살 수가 없어요. 처음에는 자료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시작했는데 읽어보니까 정말 좋은 게 많아서 출판을 하게 됐어요. 제 책과 어머니 책을 같이 준비하고 출판하는 과정에서 뭐랄까, 서로 대화를 한다고 그럴까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어머니 목소리를 듣는 것 같은 느낌. 그 당시의 일상들이 펼쳐지는 것 같아서 참 좋았어요.”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의 케케묵은 원고를 살펴보는 과정은 잊었던 어머니의 흔적 일부를 상기하는 계기가 됐다. 박완서 작가가 천착해온 주제나 메시지도 다시금 마음을 울렸다.

“70~80년대 힘들고 치열하게 사시던 시기에 쓴 글들이에요. 그때는 우리나라가 풍요로워지던 때인데도 어머니께서 그 풍요로운 것에 대해 경고를 많이 하셨더라고요. 아무리 부가 있어도 가난해서 우는 사람이 있는 부는 아름다운 부가 아니다, 하는 마음으로 쓰셨어요. 잊어버린 사건이나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고요. 한번은 구둣방에 갔는데 구두수리공이 구두를 고치기 전에 깨끗이 구두를 닦더래요. 아마 구두 닦는 값도 받으려나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구두를 잘 고치기 위해서 닦은 것이었대요. 그런 성스러운 모습을 보고 도리어 나는 작가로서 어땠나 돌아보며 자성하는 글들. 지금 봐도 좋은 글들이 참 많아요.”

맏딸 호원숙 작가는 어머니를 가장 근거리에서 오랜 시간 지켜본 자녀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바라본 어머니 박완서 작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엄마는 그냥 엄마였어요. 제가 책에도 뜨개질하시는 어머니, 옷을 만들어주시는 어머니 이야기를 썼는데 그건 우리 어머니만의 특별한 얘기가 아니었어요. 그 당시 어머니들은 어려운 시절이라 다 그렇게 입히고 먹이고 하셨죠. 그처럼 남들과 비슷한 (대단한 누군가가 아닌) 어머니의 모습이었어요. 저희에게는 끝까지 작가로서보다는 그냥 어머니였죠.”

그런 어머니도 글을 쓸 때만은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 글이 나올 때까지 바깥에 나오지 않으셨다.

“어머니와 아천동 집에 같이 살 때 어머니가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는 장편을 쓰셨어요. 계간지에 연재하셨는데 한 번에 300매를 보내셨죠. 일흔 가까운 나이에 300매를 써서 보낸다는 건 보통 집중력이 아니면 힘든 일이에요. 그때만큼은 어머니도 자기 세계 속으로 들어가버리신 거죠.”

그런 어머니를 챙기고 이해하는 것은 맏딸의 몫이기도 했다. 기력이 쇠할까 봐 유동식을 챙겨드리는 것 등 외에는 어머니의 영역에서 한 걸음 떨어져 최대한 거리를 두었다. 그런 맏딸의 수고로움과 배려 덕분에 박완서 작가의 집중력과 그 산물이 오래도록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제가 어머니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 걸 어머니도 알고 계셨어요. 반대로 제가 여러 가지로 어머니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걸 저 자신도 알고 있었죠. 어머니는 항상 염려하셨어요. 제가 최고 학부(서울대 국문과)를 나왔는데 (일적으로 무언가 더 하지 않고) 아이 낳고 가정에서 지내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힘들어하셨죠. 그렇지만 저는 저대로 ‘지금은 아이를 잘 기르는 것이 나에게 중요하다. 어머니는 다르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내 삶은 내가 판단하고 관리해야 한다’라고 생각했어요. 후에 어머니께서 어머니의 연대기를 쓰라는 미션을 주셨죠. 근데 저는 글을 잘 쓸 능력이 없어요. 기자생활도 했지만(월간지 <뿌리깊은 나무>) 겨우겨우 기사를 쓰고 그랬으니까요. 남들은 다 안 믿지만 실제로 그랬어요. 대신 그 안에는 진심이 있었죠. 글을 잘 쓴 건 아니지만 그 안에 든 내용에는 거짓이 하나도 없었어요.”


거장 작가의 딸로 산다는 것은

엄마의 소설은 중독성이 있어서 한번 손에 들고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면 읽는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그런 면에 감복하기도 하고 또 그 이유 때문에 지겨워하고 질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냥 솟아나오는 줄 알았던 엄마의 글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 가슴이 사무치게 슬퍼진다.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중

고 박완서 작가의 데뷔작은 1970년 소설 <나목>이다. 결혼하고 20년 가까이 주부로 지내던 그는 이때를 시작으로 봇물 터지듯 기라성 같은 작품을 쏟아냈다. <나목>이 나오던 그해 호원숙 작가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올 것이 왔다는 후련함이 들었어요. 미리 언급하셨거든요. 저녁식사 준비하면서 가족끼리 대화하는 자리에서 화가 박수근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얼마 뒤에 쓰셨죠.”

더 이상 주부만이 아닌 작가로서의 삶도 병행하게 된 어머니가 다소 서운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까.

“그때는 이미 철이 났죠. 그래서 어머니가 어떻게 하면 작품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심부름도 많이 했고요. 아침에 학교 갈 때 어머니 원고를 가지고 나와서 방과 후에 신문사, 출판사에 갖다 줬어요. 그러기 전에는 절대 원고를 보지 않았죠. 책으로 나오기 전에 보면 마치 예의가 아닌 것 같았거든요. 마치 우체부가 남의 편지를 뜯어보는 것처럼요.(웃음) 때로는 출판사에서 저희 어머니 원고를 받으러 집으로 직접 왔어요. 어머니가 문을 열고 나가시면 사람들이 그냥 들어와요. 우리 어머니를 일하는 사람으로 생각한 거예요. 작가는 뭔가 좀 더 그럴듯하게 하고 있을 거라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한참을 찾고 있으면 어머니가 ‘접니다’ 하세요.(웃음) 그런 상황을 재미있어하셨어요.”

그런 어머니를 적극 지원하고 도운 딸이었지만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버린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을 느낀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엄마라는 존재는 가정의 중심이잖아요. 특히 저희 어머니는 더 그랬어요. 아버지에게도 할머니에게도 우리 엄마가 제일이었죠. 그 정도로 중심이었던 사람이 문학을 하게 된다는 건, 말하자면 가정이 중심이 아니라 문학세계로 들어가버린다는 것이었죠. 그 상실감은 말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어머니의 작품을 읽고 나면 밥을 못 먹었어요. 어머니의 세계에 너무나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죠. 지금은 안 그렇지만 그때는 달랐어요. 감수성이 예민할 때였기 때문에 더 심했죠.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던 것보다 더 큰 상처 같은 게 있다고 느꼈어요.”


	[여성조선] "어머니는 흔들림 없는 작가였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은 끔찍할 만큼 사실적이고 신랄하게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다. 특히 6·25전쟁과 분단의 테마는 작가 본인의 트라우마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 특히 이혼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소설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 같은 작품은 여성학의 교과서라 할 정도라고 그래요.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여성도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셨어요. 여자 스스로 서라, 자존감을 가져라라는 메시지를 많이 주신 것 같아요.”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란 맏딸은 어머니가 지나온 길을 거의 그대로 걷는다.(박완서 작가는 서울대 국문과, 호원숙 작가는 서울대 국어교육과에 진학했다. 다만 박완서 작가는 6·25전쟁으로 중퇴했다.)

“문학은 어렸을 때부터 제 생활이었어요. 어머니가 현대 문학들을 항상 보고 계셨거든요. 그게 제게는 어떤 동경의 세계였죠. 그렇지만 국문과에 갔어도 대학 4년 동안 글 한번 써본 적이 없어요.(웃음) 능력도 없고요. 어머니는 제가 대학원에 가서 국문학 연구를 하기 바라셨지만 저는 문학이론 등에 흥미가 없었어요. 결국은 어머니처럼 소설가가 되지는 않았지만 저는 그냥 저를 ‘라이터(Writer)’라고 해요. 글을 쓰는 사람이요. 엄마처럼은 안 돼요. 저는 우리 어머니 같은 경험을 겪었던 것도 아니고 운명적으로도 (작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지, 제 능력 이상의 것을 꿈꾸지는 않아요.”

2011년 담낭암으로 별세하기까지 고 박완서 작가는 손에 꼽는 한국문학의 거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런 거장 작가의 딸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일까.

“저는 어머니가 작가이기 이전에도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어요. 도리어 (작가일 때보다) 더 그랬죠. 항상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지혜롭고 우리에게 좋은 방향을 제시해주고 세상을 보는 눈을 길러주었으니까요. 작가가 되고 나서도 좋은 작가로 인정받은 것에 대해 자랑스러웠고요. 물론 힘든 점도 있어요. 예를 들어 나를 소개할 때는 내 이름보다 ‘누구의 딸입니다’ 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더 편해요.(웃음) 물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어머니는 굉장히 오랫동안 사랑받은 작가였어요. 그야말로 초기작 때부터 오래된 팬들이 많고요. 그럼에도 어머니는 아주 개인적이셨어요. 그게 제가 어머니를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점이에요. 어머니는 누구를 거느리지도 않으시고 누구한테 거느림을 당하시지도 않으셨어요.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한 번도 거기에 흔들리지 않았죠. 평론을 어떻게 받았다 하는 것에 대해서도 흔들림이 없었어요. 철저하게 고독한 거죠. 그렇지만 사람을 보는 눈은 굉장히 따뜻하셨어요. 굉장히 유연하셨고요.”

그 따뜻한 시선이 고인의 산문집에 담겨 있다. 주변의 흔하고 사소하고 심지어 허접스럽기까지 한 사물과 사람을 고 박완서 작가는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애정 어린 시선은 이내 속마음을 들킨 듯 적나라한 표현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모녀의 산문집을 주거니 받거니 읽는 동안 마음 한 켠이 훈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