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243
yesterday:
217
Total:
1,111,926
이한우의 大學衍義 리더십]
이한우 문화부장
이한우 문화부장
중국 고대에는 고요(皐陶)라는 최고의 재상이 있었다. 원래는 순임금이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사양했고, 결국 우왕(禹王)이 뒤를 이었다.

고요는 우왕의 정치도 보좌했는데, 진덕수는 '대학연의(大學衍義)'에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탁월한, 사람 보는 법[觀人之法]으로 고요가 제시한 아홉가지 원칙[九經=九德]을 든다. 고요는 먼저 우왕에게 뛰어난 임금이 되려면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하고[知人] 백성들을 편안케 해주어야 한다[安民]고 말하고서 사람을 제대로 보는데 필요한 아홉 가지 원칙을 풀어놓는다. 이는 오늘날에는 최고지도자 뿐만 아니라 사람을 써야 하는[用人]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척도라 하겠다.

이 아홉 가지는 무엇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실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결국 속마음을 알려면 그 행실을 통해 미루어 헤아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첫째 너그러우면서도 엄정해야 한다[寬而栗]. 이는 그 반대도 가능하다. 타고난 성품이 너그러우면 엄정함으로 보완해야 하고, 반대로 타고난 성품이 엄정하면 너그러움으로 보완해야 한다. 진덕수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보완해 가면서 혼연일체가 되어 어느 한쪽도 버릴 것이 없게 된 연후에야 그 사람의 다움[德]으로 자리잡는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마구 뒤섞으라는 말이 아니다. 앞서 우리는 중용이 어쩡쩡한 중간치나 균형이 아님을 보았다. 적중하여[中] 오래가는 것[庸=常]이 중용이다. 이미 '논어'에서 공자는 다움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이 중하고 용하는 것임을 제시했다.

"적중하여[中] 오래가는 것[庸=常]이 다움[德]을 이루어냄이 지극하구나!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는 중하고 용하는 것을 오래 지속하는 이가 드물다."

이 말을 적용하면 너그러움과 엄정함 중간 쯤에 중용이 있는 것이 아니다. 너그럽되 한없이 너그러우면 물러터지게 되니 엄정함으로 일정 지점에서 잡아줘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적중해야 할 도리[中道]를 잡아 쥐는 것이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고 그냥 막연히 중간쯤 어디에 있겠거니 하면 너그럽지도 않고 엄정하지도 않은 잡스러운[雜] 지경으로 빠지게 된다. 너그러우면서도 엄정한 순수한[純] 지경에 (오래) 머무는 것이 중하고 용하는 것이다.

나머지 여덟가지는 다 중용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둘째는 부드러우면서 꼿꼿해야 한다[柔而立]' 셋째는 질박하면서도 공손해야 한다[愿而恭]. 왜냐하면 질박한 사람들은 공손을 자칫 아첨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다스리는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삼가야 한다[亂而敬]. 여기서 난(亂)은 어지럽다는 뜻이 아니라 정반대로 어지러움을 평정한다는 뜻이다. 다섯째는 유순하면서도 과단성이 있어야 한다[擾而毅]. 여섯째는 곧으면서도 따스해야 한다[直而溫]. 일곱째는 털털하면서 예리해야 한다[簡而廉]. 여덟째는 굳세면서도 독실해야 한다[剛而塞]. 마음이 굳센 사람은 대체로 은근히 오래 지속하는 경우가 힘들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힘이 세면서도 의리를 따르는 것[彊而義]이다.

만평
'서경(書經)'에 나오는 고요의 이 아홉 가지 사람 보는 원칙을 척도로 삼아 실제 현장에서 사람을 살펴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이 아홉 가지 원칙을 스스로 체화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어느 지점에서 그렇지 못한 지가 저절로 눈에 들어오는 경우다. 그러나 이런 경지는 아마 공자도 도달했다고 하기 힘들 것이다.

진덕수의 도움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다움[德]을 갖고 있다고 말할 때 이는 반드시 그 사람이 일을 실제로 행하는 것이 어떠한 지를 살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움은 일의 근본이고 일이란 다움이 (겉으로) 베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보는 중요한 관건은 일[事]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진덕수는 "많은 사람들은 '저 사람은 다움은 있는데 일은 제대로 하지를 못한다'고 말들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 다움이라는 것은 실로 허망한 말일 뿐이다"고 말한다. 즉 저 사람은 착한데 일은 못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선(善)은 착하다는 뜻이 아니라 잘한다는 뜻이다. 선인(善人)을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착한 사람으로 옮기고 있는 우리 학계의 눈으로는 지금 진덕수의 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조선에도 사람 잘 보는 것으로 유명했던 재상이 있다. 명종과 선조 때의 정승 이준경(李浚慶)이다. 그의 호가 동고(東皐)인데 이는 고요(皐陶)에서 따온 것이다. 동방의 고요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