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고향' 日 교토·고베 등 순례 나선 25명의 한국독자들

가장 먼저 찾은 고시엔 球場
박물관처럼 보이는 야구장, 모든 것이 변해버린 고향서 예전모습 간직한 유일한 곳

변해버린 고로엔 해변
어릴적 헤엄치며 놀던 곳이 유원지·주택가로 재개발… '바다 사라지고 없었다' 묘사

인상깊었던 고베高 건물
명문고 위용 자랑 校舍 보니 공부만 잘하는 학생에 대한 냉소적 태도가 짐작되더라

그의 문학 원동력은 鄕愁
19세때 도쿄 이주 객지생활… 도회적 이미지 표현하지만 고향의 이상적 세계를 갈망

"학교는 산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 옥상에서는 시내와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방송부실에서 오래된 레코드를 열 장쯤 몰래 가지고 나와 옥상에서 마치 플라스틱 원반처럼 날린 적이 있었다. 그 레코드들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바람을 타고 마치 한순간의 생명을 얻은 것처럼 행복한 듯이 항구 쪽까지 날아갔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한 구절처럼, 학교는 정말로 높다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난 7일 오후 고베고등학교 정문. 4층짜리 교사(校舍)가 비에 젖어 있었다. 수업 중이라 학교는 적막했다. 멀리 운동장 너머로 항구가 보였다.

1895년 설립된 이 학교는 일본 현대문학의 대표주자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66)의 모교다. 한국에서 온 '하루키 팬' 스물다섯 명이 학교 정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롯데백화점과 문학동네, 롯데 JTB가 공동 기획한 '하루키 소설 속으로 떠나는 청춘문학기행' 참가자다.

하루키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일본 교토, 니시노미야, 아시야, 고베 일대를 탐방하는 2박 3일간의 기행에 참가한 이들 중 네 명이 '가장 인상 깊었던 곳'으로 고베고등학교를 꼽았다. "웅장한 건물이 가슴에 깊이 남았다. 하루키가 명문고를 나왔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하루키가 소설이나 에세이에서 견지하고 있는, 고등학교 시절의 공부만 잘하는 학생들에 대한 냉소적인 분위기가 어디에서 나온 건지를 짐작하게 되었다." 유성환(30)씨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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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롯데백화점 제공
변함없는 고향의 상징, 고시엔 구장

"이 세상에는 고향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고향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 양쪽을 구분짓는 기준은 대부분의 경우 일종의 운명의 힘인데, 그것은 고향에 대한 상념의 비중과는 약간 다른 것이다. 좋든 싫든 간에 나는 후자의 그룹에 속해 있는 것 같다."

하루키의 여행기 '하루키의 여행법'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하루키는 1997년 5월 혼자 니시노미야에서 고베까지 걸어서 여행한다. 1995년의 한신대지진이 고베 일대를 할퀴고 지나간 지 2년 후의 일이었다. 그는 교토에서 태어나 니시노미야와 아시야에서 초·중학교를 나오고, 고베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하루키는 "2년이 지난 후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은 듯한 거리가 실제로 어떤 변모를 이루어 냈는지, 그리고 그 거대한 폭력이 거리에서 무엇을 빼앗아 가고 무엇을 남겼는지를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썼다.

하루키는 1968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도쿄로 떠났다. 재즈와 맥주, 달리기를 즐기는 도회적인 이미지이지만, 하루키 문학의 원동력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하루키의 작품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고향의 이상적인 세계를 갈망한다.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 와타나베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의 연인 나오코를 사랑하게 된다. '1Q84'의 주인공 덴고와 아오마메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주인공은 고향 친구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

6일 오후 니시노미야의 고시엔(甲子園) 구장. 경기가 없는 날이라 구장 문은 닫혀 있었다. 휴관일인 월요일이라 역사관도, 기념품 가게도 문을 닫았다. 등나무 잎으로 뒤덮인 벽돌 구장은 야구장이라기보다는 고풍스러운 박물관처럼 보였다. 비가 세차게 내렸다. 하루키의 1997년 여행을 모델로 한 이번 기행에서 '하루키 원정대'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고시엔 구장은 일본 프로야구팀 한신 타이거스의 홈구장으로 일본 고교야구의 성지(聖地)로 불리는 곳. 매년 봄과 여름 이곳에서 전국 고교야구대회가 열린다. 작은 카페를 운영하던 스물아홉 살의 하루키가 도쿄 진구 구장에서 야구 경기를 보던 중 1회 선두 타자가 2루타를 치는 것을 보고 문득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일화는 하루키 팬들 사이에선 유명한 이야기다.

참가자 전영민(43)씨는 "이 여행을 오기 전 하루키의 단편 '예스터데이'를 읽었다. 도쿄 출신인 등장인물이 한신 타이거스 팬이라 소외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간사이 사투리를 배워 고시엔 구장에서 응원하는 장면이 나온다"면서 "소설에서 뼛속까지 간사이 사람인데 낯선 도쿄 생활을 했던 하루키의 외로움이 역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1997년의 도보 여행 첫날, 하루키는 야구 경기 포스터를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고시엔 구장으로 향해 야구를 본다. 하루키에게 고시엔 구장이란 모든 것이 변해버린 고향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최후의 보루 같은 곳이다. 야구를 보러 간 하루키가 썼다.

"고시엔 야구장은 내가 어렸을 때와 거의 똑같았다. 좀 묘한 표현이지만 마치 시간이 탈선한 것 같은 그리운 위화감을 나는 절실하게 느꼈다."

변해버린 고향, 오마에하마 공원

7일 오전 니시노미야의 오마에하마 공원 방파제. 바다는 저 멀리 있었다. 방파제 아래엔 바다보다는 우선 풀밭과 모래밭이 펼쳐졌다. 색색깔 우산을 받쳐든 참가자들이 방파제 아래로 내려가 모래밭에 섰다. 이번 기행의 연사로 나선 '하루키를 찾아가는 여행' 저자 신성현씨가 "하루키가 어렸을 때엔 이 모래밭이 모두 바다였다.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과 에세이에서 여러 번 '산을 깎아 바다를 메운 해변'이라고 이 바닷가를 묘사한다"고 말했다.

오마에하마 공원의 고로엔 해변은 하루키에게 '변해버린 고향'의 상징이다. 하루키가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헤엄치고 모닥불 피우며 놀았던 해변은 주택가와 아담한 유원지로 재개발됐다. 하루키는 단편 '5월의 해안선'에서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고향을 찾은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바다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바다는 몇 킬로미터나 멀리 밀려나 있었다. (…) 그리고 그 황야에는 수십 동의 고층 아파트들이 마치 거대한 묘지의 표석처럼 눈이 닿는 곳까지 늘어서 있었다."

실체는 없었지만 '상상'으로 만든 여행

이번 기행의 참가자들은 '1Q84' 감상문을 제출하고 선발됐다. '1Q84'는 한국어 번역본 세 권의 페이지 수 합이 1900여 쪽에 달하는 대작이다. 참가자 대부분이 하루키의 열렬한 팬이다. 하루키 작품 속 구절들을 속속들이 꿰고 있을 정도다.

단지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행을 불사한 만큼 참가자들의 사연도 다양했다. 부산에서 온 이정인(33)씨는 5세, 1세 두 딸의 엄마다. 그는 "20대 때 하루키에게 심취했는데,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우면서 6년간 책 한 권도 못 읽었다. 남편에게 '휴가를 달라'고 해 두 아이를 맡기고 대장정에 나섰다"고 말했다.

박미선(31)씨는 8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후 기행에 참가했다. 그는 "이 여행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거다. 여행 내내 하루키가 이야기하는 청춘과 상실, 고독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성환씨는 '1Q84'의 주인공 '덴고'와 마찬가지로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친다. 유씨는 "'노르웨이의 숲' 주인공 와타나베가 '위대한 개츠비'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었다. '위대한 개츠비' 영문판뿐 아니라 하루키가 번역한 일어판, 스페인어, 프랑스어판까지 모두 갖추고 있다"고 했다.

기행 마지막 날 오전, 일행은 교토의 데마치야나기역 버스 정류장에 있었다. 32번 버스가 정차해 있었다. '노르웨이의 숲' 여주인공 나오코가 입원한 요양원의 배경인 히로가와라행 버스다. 열 시에 버스가 출발했지만 일행 중 아무도 버스에 타지 않았다. 교토에서 히로가와라까지 왕복 네 시간. 귀국 비행기 일정을 맞추려면 정류장에 서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무성(無聲)영화 같은 2박 3일이었다. 야구장은 문을 닫았으며, 하루키가 수학한 학교는 수업 중이라 출입을 금지했고, 그가 공부했던 도서관 학습실은 회의장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이 '실체 없는' 여행의 해답을 참가자 전지현(38)씨가 내놨다. "이 여행은 결국 하루키의 책을 읽은 우리들 개인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들을 상상 속 요양원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신성현씨가 '노르웨이의 숲' 중 와타나베가 요양원으로 나오코를 문병 가는 장면을 느릿하게 낭독했다.

"손님을 스무 명 정도 태우자 버스는 바로 출발하여 가모가와를 따라 교토 시내를 북쪽으로 지났다. (…) 이윽고 버스는 산속으로 들어섰다. 구불구불한 길이라 운전사는 쉴 틈도 없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리고 나는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마신 커피 냄새가 아직 위 속에 남았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7/10/2015071001923.html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