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산 암릉 구간을 지나고 있는 종주대. 이 바위능선 또한 지나기에 만만치 않다.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김용하(45세, 해남군청종합민원과)씨의 유년시절 집은 해남 5일장이 열리는 고도리 인근이었다. 이 때문에 장이 서기 전날이면 김씨의 집 2000원 짜리 합숙방은 강진, 영암, 완도 등지에서 모여든 장사꾼들로 미어터졌다. 당시 해남 장의 규모는 전남을 대표할 만한 것이었는데, 금강재와 우슬치, 오십치 같은 고개에는 해남읍장에 가기 위한 사람들로 긴 줄이 생길 정도였다. 어린 김씨도 매주 돌아오는 장날을 기다렸다. 원숭이를 데리고 와 약을 파는 약장수, 구경 나온 사람들의 점괘를 봐 주는 점쟁이, 길거리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이들 등 볼거리 놀 거리, 먹을거리가 수두룩했다.
달마산 암릉의 전모. 나무데크나 안전시설 설치가 조금 미흡하다. 방심하지 말 것!
이후 교통이 발달하면서 해남 5일장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고 하는데 올 6월 첫째 주 찾은 해남 장에서 예전의 흥겨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감자, 오이, 고추 등 각자 집에서 소량으로 재배한 농산물과 북일면과 북평면에서 캐온 바지락•꼬막•개불, 화산면에서 잡은 낙지•개갱이, 백일도에서 낚은 붕장어 등 싱싱한 농축수산물을 팔고 사는 이들로 해남장은 북적였다. 한편 해남 5일장은 ‘개장 80년’이라는, 전국 지방 재래시장 중 유례없는 공식 개장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00년도 넘게 이어져 왔을 해남 장의 이력을 이렇게 숭덩 잘라먹은 이유는 1931년 해남 천변교와 유신교 사이에 있었던 기존의 해남 5일장을 지금의 고도리 인근으로 옮긴 후 새로 열었기 때문이다.
대둔산 전 도솔봉에서 대둔산으로 가고 있다. 풀숲에 암릉이 숨겨져 있다.
일제 강점기 시대였던 당시 해남읍 남동과 고도리 주민들은 해남천이 점점 오염돼 가는 데 대한 원성이 높았다. 해남천 상류에서 열렸던 5일장 때문에 장날이면 각종 쓰레기와 동물의 분뇨가 천으로 흘러내린 탓이었다. 이로 인해 해남 장은 고도리 약 110㎡(3300평) 부지로 옮겨졌으며 이때부터 중앙시장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소도읍 공사를 하지 않았음에도 지금 천변교에서 읍내리의 매일시장으로 가는 천변가 길목이 넓은 것은 이곳이 원래 5일장 터였기 때문이다.
닭골재 굴다리를 향해 가고 있다. 바로 전 구간에서 수풀로 덮여있는 길을 통과하는라 애를 먹었다.
장에서 구입한 각종 해산물로 전날 밤부터 아침까지 푸짐하게 차려먹은 우리는 그 기운을 모아 아침 일찍 대둔산(673.5m) 정상에 섰다. 지난달에 비해 산은 초록색 숲이 더 풍성해진 채였다. 이 때문에 길이 막혀버렸을까 싶어 은근히 걱정이 됐지만 다행스럽게도 등산로는 탄탄대로였다. 풀만 무성했을 뿐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땅끝 천년숲 옛길을 가던중 만난 명당. 여지없이 뒤에는 묘가 있었다.
대둔산 정상은 방송사 통신탑 때문에 올라갈 수 없었다. 우리는 우회로를 따라 통신탑을 길게 에돌아 종주를 이어갔다. 대둔산을 지나자 가파른 내리막이 나왔다. 동시에 커다란 암벽이 발밑에 등장함에 따라 한창 속도가 붙은 종주대는 갑작스럽게 멈춰야 했다. 로프 같은 안전장치가 없었던 까닭에 암릉구간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급한 내리막에서 내려서자 길은 다시 순해졌다. 그제야 주변 경치가 눈에 들어왔으며 종주대는 다시 재잘재잘 대며 즐겁게 산행을 시작했다.
“서울서는 낙지가 엄청 비싸다면서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질리도록 먹은 게 낙지에요.” 능선 왼쪽으로 햇빛에 몸통을 드러낸 넓은 갯벌이 눈에 들어왔다. 김옥희(49세, 해남군청 주민복지과)씨가 가리킨 북일면 내동리 일원은 굴과 낙지, 꼬막 등이 많이 잡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맛 또한 일품이라 “내동리 물건이라면 볼 것도 없이 먼저 사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시장에서도 최고로 쳐준다. 이 동네에서 낙지를 잡는 방법이 특이한데, 그 수가 워낙 많은 지라 만조 때 방조제로 가면 뜰채로 몇 시간 만에 수십 마리를 건져 올리는 마을주민들을 쉽게 볼 수 있단다. 닭골재로 가는 내내 우리는 시원한 전경과 마주했다. 왼쪽에는 바다, 오른쪽에는 평야가 펼쳐지며 가슴속을 뻥 뚫어놓았다. 바람마저 시원했던 덕분에 햇살의 뜨거운 기운은 살갗에 내려앉을 기회가 없었다. 조망이 좋았던 이유는 암릉 구간이 많아서였다. 멋진 경치를 자주 볼 수 있었던 대신 운행속도가 느렸으며 풀 숲 아래 숨겨진 수많은 암각에 자주 발이 걸려 피곤하기도 했다.
1. 달마산 암릉을 통과 중인 이재철 해남 부군수. 산을 좋아하는 그에게 달마산의 험한 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2.“완주했다!” 종주에 참여한 대원들이 땅끝 전망대에 모였다.
“이번이 마지막 구간 맞나요? 정말로 내일 땅끝탑에서 이 길이 끝나게 될까요?”땅끝기맥 능선이 마지막을 향해 가는 종주대가 아쉬워 발목을 잡는 게 분명했다. 점심때가 다 되어 가는데도 닭골재는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암릉은 넘고 또 넘어도 끊임없이 종주대 앞을 가로막았으며 햇빛 또한 점점 강렬해졌다. 대원들 모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지쳐갔다. 이런 와중에도 시답잖은 농담으로 종주대의 분위기를 한껏 고양시킨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재철 해남 부군수였다.
그는 처음 산행에 참여했음에도 종주대와 스스럼없이 어울렸으며 해남의 여러 명소에 대해 소개하는 친절함까지 보였다. 237봉을 지나자 길은 온갖 잡목으로 덮여버렸다. 발 아래로 난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키까지 뻗친 나뭇가지들이 온 몸을 할퀴어 댔다. 우리는 모두 권투선수가 방어를 취하는 자세로 산길을 올라야 했다. 그런 길은 닭골재까지 이어졌다. 숲에 묻혀 끊어질 듯하던 등산로를 겨우 이어가다가 결국 길을 잃고 말았으나 다행히도 바로 앞 임도로 떨어지는 바람에 쉽게 닭골재까지 갈 수 있었다.
대둔산에서 닭골재로 내려가던 중 만난 절경. 능선을 종주하는 내내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
“국수를 삶은 다음에 참기름을 발라두면 면발이 불지도 않고 잘 상하지도 않아요!” 닭골재 굴다리 밑에서 손일순씨가 준비해온 열무국수와 함박골큰기와집 민박의 김순란 사장이 들고온 막걸리로 배를 두둑이 채운 뒤 달마산(470m)으로 향했다. 더위가 극성이었으나 울창한 숲에 들어서자 이내 잠잠해졌다. “길 좋다!” 닭골재 이전 구간과 달리 등산로가 시원스러웠다.
경사도 완만했기에 산행 분위기는 활기찼던 처음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측백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공터가 나왔으며 신준식 기자는 고즈넉한 이곳을 그냥 지나치기 아쉬웠던 모양인지 난데없이 ‘오침’을 하자고 제안, 이 말에 대원들은 각자 편한 곳으로 흩어져 달콤한 낮잠을 즐겼다. 작은 닭골재와 바람재를 지나니 경사가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에는 또다시 암릉이 나타나 종주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낮잠을 자면서 비축해둔 에너지가 거의 바닥날 지경에 이를 때쯤 암봉의 정상에 올라섰다. “아직 2시간은 더 가야할 것 같은데.” 달마산 정상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미황사에 일찍 도착해 쉬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다른 대원들도 모두 김이 빠진 모양인지 넋을 놓은 채 달마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지런히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힘차게 출발했다. 삐죽삐죽 솟은 암봉을 우회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능선의 저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바람에 힘이 배로 들었다. 즐비하게 늘어선 기암괴석들이 징글징글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서두른 탓인지 1시간 30분 만에 달마봉에 도착했다. 주변이 어둑해졌기에 멋진 조망을 감상할 틈도 없이 우린 문바위로 향했으며 문바위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미황사로 내려갔다. “이리 들어오너라. 나랑 같이 자자!” 미황사는 반딧불 천국이었다. 이연옥씨는 숲 곳곳에서 반짝거리며 날아다니는 이들을 잡아다가 텐트 안에 들일 작정으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으나 실패, 멀찍이 떨어져서 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다음날 우리는 아침에는 새소리 대신 요란한 버스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미황사 주차장까지 올라온 3~4대의 버스에서 등산객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으며 그네들은 곧장 달마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서울근교에서 출발해 밤새도록 달린 모양인지 등산객들은 모두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우리에게 부러움의 눈길을 던지기도 했다. 우리는 그들의 시선을 즐기며 느긋하게 짐을 챙긴 뒤 미황사로 올라왔다. “여기 아랫마을 서정리 어르신들이 하는 말을 얼핏 들었는데 비바람 치는 을씨년스런 날에는 꼭 ‘미황사 스님들 군고친다’고 하더라고요.” 김용하씨의 말인 즉, 돌로 만든 배를 타고 온 검은 소가 점지한 절집, 천년고찰 미황사는 한때 도솔암, 문수암 등 열두 암자를 거느렸던 큰 사찰이었다. 그런데 그 위세가 하루아침에 급격히 떨어진 일이 벌어졌다.
약 150년 전 미황사 스님들은 중창불사를 위해 ‘군고(풍물패)’를 꾸려 해안을 돌며 일종의 공연을 하고 시주를 모았다. 그런데 어느 날 40여명의 스님들로 꾸려진 군고단은 배를 타고 청산도로 원정공연을 가다가 풍랑을 만나 몰살을 당했다. 남은 것은 절에 남은 나이든 스님 몇 분과 군고를 꾸리느라 진 빚더미 뿐. 이때부터 미황사는 쪼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폐사 직전까지 갔다. 흉가가 다된 미황사를 다시 일으킨 이는 현공(현 미황사 회주) 스님으로 그가 20년간 노력을 기울인 끝에 지금의 유명한 사찰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