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의 선구적 종교 개혁가 존 위클리프 >
"개혁의 샛별"로 불리는 개혁주의자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4-1384)는 에드워드 2세 때인 약 1324년 경에 태어났다. 성경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위클리프는 이단으로 몰려 정죄를 받고 출회를 당했으나, 그래도 1384년에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성경번역을 수행했다.
그런데 그 때까지는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번역 성경은 일일이 손으로 필사를 해야했다. 보통 한 권의 성경을 필사하는데는 열 달 정도가 걸렸고, 그 가격도 만만치가 않아서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의 일년치 봉급이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성경이 필사되자, 마침내 영국 국회 법령을 제정하여 위클리프의 성경을 보급하지 못하게 하였다.
1382년 그의 모든 저술들은 불태워졌다. 그 해에 위클리프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1384년 12월 31일 두 번째 쓰러져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위클리프가 죽은 후 그의 적대자들은 1415년에 있은 콘스탄스 공의회에 위클리프의 사상을 제출하였고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레고리 11세와 우르반 6세는 그 이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위클리프를 정죄한 바 있다. 1428년에는 그의 시신이 축성된 장소로부터 이장되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를 1500년대의 개신교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여겼지만, 개혁의 시작에 있어서 그의 직접적인 영향에 대하여는 놀랄만큼 적게 알려져 있다. 단지 후스(Jan Hus) 만이 위클리프의 성과물들 중 어떤 것을 읽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위클리프는 주로 성서 번역에 있어서 기억되고 인정받고 있다. 1380년대 초기에 그는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이끌었고 다른 이들보다 더 관용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로 된 두 개의 완전 번역본을 내었다. 그것은 설교자들이 영어로 된 성경을 읽고 그것으로 설교하게 되는 새로운 종교적 상황을 가져왔다. 오늘날 위클리프의 성서번역은 위클리프 성서번역 협회가 뒤를 이어받아 세계의 모든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한 노력으로 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