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의 영적 아버지 마포삼열 >
마포삼열(Samuel A. Moffett)은 1864년 미국 인디애나주 매디슨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포목상을 경영하였으며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좀 자유 분방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경건한 신앙을 배웠으며 11세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마포삼열은 하노버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대학원에서는 화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러나 박사과정을 마친 뒤 그의 생각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데 투자하기가 아까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이자 많은 해외 선교사를 길러낸 맥코믹 대학에 1885년 입학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한국 선교사로 일했던 베어드(W, M. Baird)와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마포삼열은 기도 중에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땅으로 영접하고 한국백성과 한국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희생하였습니다. 그는 1889년 4월 15일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890년 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서 서울 마포강변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었습니다. 처음 6개월간은 한국어를 공부하였고, 언더우드로부터 경신학교의 전신인「예수교학당」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몰두하였습니다.
1893년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901년 평양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하였으며 1904년에 정식으로 평양신학교 교장(1904∼1924)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인을 각별히 사랑하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독립의 성취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혼란기에 처한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수완을 발휘하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위기였던 일제 말기에 있어서 한결같은 자세로 신앙의 지조와 신학의 정통성을 지키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마포삼열은 병을 얻고 요양을 위해 귀국하였다가 1939년 10월 24일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별세하였습니다.